이재경 l 변호사 · 건국대 교수
    청와대, 경복궁 그리고 진짜 패션!

    dhlrh
    |
    22.10.17조회수 5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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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 청와대? 뭔 경복궁? 애당초 패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요즘 자주 튀어나오고 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 패션계 내부에서 청와대나 경복궁을 소환한 것은 아니다. 74년 만에 국민에게 개방한 청와대에 패션의 아우라가 스며드는 과정에서 상상 밖으로 커다란 잡음이 발생한 것이다.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한류 콘텐츠를 통해 세계로 뻗어나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지난 8월 말 보그코리아가 공개한 한복 패션 화보 ‘청와대 그리고 패션!’은 청와대 본관, 영빈관, 상춘재, 녹지원 등에서 촬영됐다. 국내 톱모델 한혜진과 김원경 등이 한복과 드레스를 선보였다. K-패션을 문화유산에 담아 세계에 널리 알리고 한복의 예술성을 돋보이려는 의도였지만, 한혜진이 입은 흰색 드레스가 일본 디자이너 ‘류노스케 오카자키’의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역사성과 정체성에 관한 논란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직전 정권에서 청와대 생활을 했던 어느 비서관은 국가의 품격이 달린 문제라고 한탄했다. 야당 의원도 한복을 홍보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했다고 일갈했다. 한복 디자이너 박술녀는 지상파 방송에서 “서양 드레스에 우리나라 꽃신 하나만 신으면 그게 한복인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문화재청장은 국회에 불려 나가 청와대 활용의 미흡함을 사과하면서, 이용 규정을 강화해 재발을 방지하겠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청와대 패션 화보의 파장이 커지자 보그코리아는 즉시 화보를 삭제했다.

    불똥은 11월 구찌코리아가 기획하는 경복궁 근정전의 ‘구찌 코스모고니(Gucci Cosmogonie)’ 컬렉션 패션쇼 행사의 일방적인 취소로 이어졌다. 문화재의 활용과 관련된 국내 여론이 악화됐다는 이유만으로 구찌와의 협약을 아연실색하게끔 일방적으로 해지할 수 있다는 문화재청의 생각에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계약법상 계약의 해지는 예외적으로 인정된다. 즉 상대방의 채무불이행이나 사정변경의 원칙에 따라 현저한 상황 변화가 발생한 경우에만 비로소 적법한 해지권 행사가 인정된다. 문화재청의 패션쇼 취소 조치는 법률적인 측면을 떠나, 국제사회에서 비상식적이고 문화적으로 미개한 국가로 손가락질받을 만한 처사였다.

    뒤늦게 우리 문화유산을 알린다는 문화재청의 판단에 따라 구찌 패션쇼는 개최될 예정이지만, 정치의 무자비한 개입과 지긋지긋한 진영 싸움에 패션계는 이미 상처를 받았다. 자유로움과 상상력으로 무장해야 하는 ‘패션’이 문화재 활용 규정과 여론이라는 꽉 막힌 틀에 왜 무너져야 하는지…. 문화재가 돈벌이에 쓰인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어느 나라든지 문화재를 통해 관광수익을 올리는 기본 메커니즘 앞에서는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패션이 가진 끝없이 도전하는 창조정신은 문화재의 기존 편견이나 고정 인식을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지 않을까? 패션은 문화재를 학습하는 도구가 아니다. 문화재를 물리적 · 의미적으로 심대하게 훼손하지 아니한다면, 패션이 추구하는 자유와 창조력은 최대한 보호해야 한다. 도라산 벽화사건에서 억압하는 정권을 문제 삼았다면, 보그 화보 역시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최대한 인정돼야 한다.

    청와대에서 경복궁을 향해 패션이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정치의 눈치를 보는 패션이 진짜 패션일까? 더 나은 세상에서는 진짜 패션이 가짜 정치와 진영을 패대기칠 것이다.


    ■ profile
    - 건국대 교수 / 변호사
    - 패션디자이너연합회 운영위원
    - 패션협회 법률자문
    - 국립현대미술관 / 아트선재센터 법률자문
    - 국립극단 이사
    -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이사
    - 콘텐츠분쟁조정위원회 위원
    -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 한국엔터테인먼트법학회 부회장
    - 런던 시티대학교 문화정책과정 석사
    - 미국 Columbia Law School 석사
    - 서울대 법대 학사 석사 박사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2년 10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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