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br>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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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2)

Thursday, Sept. 15, 2022 | 외고, mizkim@fashion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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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두 개의 세계와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한다. 첫 번째는 스페이스눌의 CEO로 부대끼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는 낮 시간이다. 나는 이를 ‘기능적 세계’ 또는 ‘기능적 시간’이라 부른다. 두 번째는 도스토옙스키, 쿤데라, 지드, 카프카, 니체 등 세계 대문호들과 토론하고 사랑하는 오롯이 내가 주인이 되는 고요한 새벽 시간이다. 나는 이를 ‘시적 세계’ 또는 ‘시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낮 시간이 플라톤이 말한 ‘그림자의 시간’, 즉 허상의 시간이라면 새벽은 내게 ‘이데아의 시간’, 즉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의 시간이다. 이것이 바로 패션 전문가라는 기능적 자아와 인문학자라는 시적 자아가 공존하는 방식이다. 이데아의 세계 없이는 그림자의 세계가 존재할 수 없듯이 시적 세계 없이 나는 이 기능적 세계를 살아낼 재간이 없다. 기술적 · 실용적 · 현실적인 세계는 일단 힘들고 공허하다.

이처럼 기능적 세계를 버거워하는 사람이 어쩌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패션계에 발을 딛게 됐을까? 이 질문에 내 대답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패션 회사 CEO로서 지극히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기능적 답변이고, 두 번째는 삶을 하나의 문학 텍스트로 바라보는 인문학자의 시적 답변이다.

먼저 패션회사 CEO로서 할 수 있는 기능적 답변이다. 2002년, 미국에서 유학을 마친 나는 귀국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예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는 지인을 만났는데, 자신의 소속사에 있는 배우 A의 스토리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당시 패셔니스타로 꽤 이름을 날리던 배우였는데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던 듯싶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그의 성공스토리에 잔뜩 동화돼 있던 순간, 지인이 나의 오지라퍼 기질에 불을 댕기는 결정적 한마디를 남겼다.  

“그 친구가 매장을 내고 싶어 해. 옷 가게를 하고 싶대….”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그가 꿈을 이루는 데 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는 욕구가 불타올랐다.

“내 주변에서 김 박사만큼 옷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잖아. 이사로 등록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와서 매입한 옷 좀 점검해 주고, 점심이나 한 끼 하면 어때?”

좋아하는 옷을 실컷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한데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한 달에 30여 만원의 거마비까지 챙겨 준다니,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기획사 사장과 A가 50 대 50으로 지분을 투자해 만든 한 패션회사의 이사가 됐다.  

얼마 후 초기 자본금 몇 억을 손에 쥔 배우 A가 본격적인 바잉을 위해 이탈리아로 출장을 떠났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A가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팔 물건은 하나도 없고 자신이 입을 옷만 잔뜩 쇼핑하고 돌아왔다.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들에게 A는 또 한 번의 폭탄을 던졌다. 이탈리아에서 사 온 제품을 카피해 판매하겠다는 것이다. 카피캣만은 막아야겠기에 처음으로 그에게 강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기자본금은 모두 소진됐고 A의 태도가 돌변했다. 자신은 더 이상 CEO가 아닌 CD(Creative Director)를 하고 싶다며, 월 급여로 3000만원을 요구했다. “기획사와 내가 50%씩 투자한 회사지만 내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프로젝트라 회사보다 나의 리스크가 더 크다.

이런 상황에서 수익을 반반으로 나눠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니 급여를 더 달라”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추가 투자 여력이 없다. 하지만 기존 투자 자금은 반드시 지키고 싶다”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사업은 ‘insurance(보험)가 아닌 investment(투자)’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열심히 설명했지만 끝내 A는 귀를 닫아 버렸다. 자신이 불리할 때만 나오는 ‘짧은 가방끈’을 핑계 삼아 불철주야 자신이 요구하는 것만 늘어놓았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다 있구나’ 그렇게 기획사와 A의 동업은 끝이 났다.  

문제는 지인이었다. 사업은 이미 론칭했고 적지 않은 투자금도 투입했다. 누구처럼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그가 내게 SOS 신호를 보내왔다. 1~2년 만 사업을 맡아주면 그 후에는 자신이 어떻게든 이끌겠다는 것이다. 흔한 가계부 한 장 써 본 적 없는 내가 사업을 할 수 있을까 무서웠지만 용기를 냈다. 그렇게 도산공원 에르메스 뒤 예쁜 3층 건물에 ‘스페이스 눌’이라는 하얀색의 몽환적인 편집숍이 태어났다.

두 번째, 인문학자의 시적인 답변은 이렇다. 대학 시절 내가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책(인문학)과 옷(패션)!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머리에 든 게 없으면 책이라도 많아야 하고, 외모가 떨어지면 옷이라도 잘 입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학교에서 시험이 끝나면 나는 항상 벌이 꽃향기에 끌리듯 이화여대 앞으로 나가 옷을 사고 신발을 맞췄다.

새 옷과 새 신발을 구입했지만 그대로 입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굳이 수선집을 찾아가 내 마음에 맞게 수선해 세상 하나뿐인 옷으로 만들어 입었고 신발 역시 그랬다. 1980년대 후반,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대학생들이 대학가를 활보하던 그 시절에도 나는 하이힐에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옷과 머리, 액세서리가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절대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인간은 생물학적 유전자인 DNA와 비유전적 문화 요소인 Meme(밈)으로 구성된다. ‘an apple doesn't fall far from the tree(사과는 나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미국 속담은 이 의미를 잘 요약하고 있다.  

DNA의 뿌리는 나무, 즉 부모다. 내게는 예쁜 것을 좋아하는 예쁜 엄마가 있다. 엄마는 집에서도 항상 드라마틱할 정도로 예쁜 옷을 입고 계셨고 늘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셨다. 연세가 많은 지금도 몸과 마음 그리고 주변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내가 공부하는 모습만 봐도 머리가 아프다고 하실 정도 책과는 거리가 먼 분이다.

반면 아빠는 늘 곁에 책을 두셨다. 한 손에 책을 든 아빠는 엉뚱한 짓을 하는 엄마와 딸들을 보면서도 항상 ‘예쁘다’라며 허허 웃으셨다.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다.

그런데 이토록 훌륭한 부모님의 좋은 유전자는 네 살 터울 언니에게로 몰빵이 됐다. 언니는 엄마의 생물학적 유전자를 이어받아 정말 예쁘고, 아빠를 닮아 어려서부터 지적이고 성숙했다. 어린 나이에도 돈이 생기면 서점에 가서 삼중당 문고판을 사서 읽을 정도였다. 그녀는 나와 다른 차원에 사는 성의 성주 같았고, 질투나 부러움이 아닌 경외의 대상이었다. 내게 이런 언니가 있다는 사실이 마냥 자랑스럽기만 했다.

반면 나는 엄마의 생물학적 예쁨은 닮지 못했지만 예쁜 것을 좋아하는 엄마의 비문화적 문화 요소를 체화했다. 적어도 도스토옙스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덕분에 돈이 생기면 서점으로 향하는 언니와 달리 슈퍼마켓이나 문방구로 달려갔다. 짤랑거리는 동전을 손에 들고 내 영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달콤한 간식을 사 먹거나, 귀여운 티셔츠 또는 바비 인형의 옷을 샀다.  

‘책과 옷’, 즉 ‘인문학과 패션’은 내 삶을 관통하는 두 가지 핵심 코드다. 인문학과 패션,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크게 보면 같은 결을 갖고 있다. 먼저 옷은 신체를 보호하고 단점을 보완해 자신감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개인의 취향, 성격, 기호 등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반면 책은 생각의 근육을 강하게 하고 사유의 시선을 높이는 정신의 덤벨이다. 외부의 시선과 편견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자신감을 높여주며 각자의 개성을 나타내준다는 의미에서 인문학과 패션은 다른 듯 닮았다.


■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 스토리
- 패션MD 시리즈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2년 9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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