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 패션 쿠데타 「베트멍」 주목

    har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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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2.14조회수 18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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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성 + 반항기 뿜는 독특한 아우라



    색 마스크를 쓴 익명의 다수가 옳은 가치를 위해 싸우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떠올리게 하는 패션 브랜드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 과장되게 큰 옷들을 선보이고 마레의 게이 전용 섹스클럽에서 패션쇼를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또 패션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던 비옷이나 소방복 등을 컬렉션에 선보이며 우리의 편견을 비웃는다.

    바로 익명의 디자이너 그룹이 만든 「베트멍」이라는 브랜드로, 짧은 시간 동안 파리는 물론 전 세계 패션계를 사로잡아 현재 가장 핫한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베트멍’은 불어로 ‘옷’이라는 평범한 뜻으로 패션 브랜드 이름이라고 하기에는 의아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구글에서 해당 브랜드의 정보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해 봐도 단번에 「베트멍」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브랜드명이 한 번이라도 더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이 유리한 것 아닐까? 하지만 이런 보통명사를 브랜드명으로 사용한 것이 오히려 반항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들이 선보이는 의상들이 기존 패션 산업에 소리 없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네이밍 ‘옷’, 짧은 시간에 전 세계 경악
    의도치 않게 반항적인, 그래서 한없이 쿨한 「베트멍」의 정체성은 그야말로 2016년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의 모습 그대로다.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나 수많은 패션 코드와 상관없이 단지 자신들이 입고 싶어 하는 옷을 만드는데 사람들은 그에 열광한다. 마치 지금까지 이런 의상과 이런 브랜드를 기다려 왔다는 듯.

    「베트멍」을 이끌어 가는 디자이너 그룹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이들이 이뤄 낸 성과는 보수적인 파리 패션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회자된다. 특히 그룹의 리더이자 창립 멤버인 뎀나 그바살리아(Demna Gvasalia)가 2015년 말 알렉산더 왕의 뒤를 이어 「발렌시아가」의 아트 디렉터로 발탁되며 「베트멍」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은 더욱더 커졌다.

    2014년 첫 컬렉션을 선보인 이래 단 세 번의 컬렉션 만에 파리패션위크에 입성, LVMH프라이즈 결승 진출, 오트쿠튀르 초대에 이르기까지 「베트멍」은 채 2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지금까지의 어떤 신생 브랜드보다 높이, 빠르게 성장했다. 전 세계 패션 산업의 혼란기이자 재편기에 나타난 이 브랜드는 철저한 베일 전략과 맞물려 더욱 관심이 증폭됐다. 곳곳에서 이들의 성공 비결을 묻는 이들이 많은 것은 분명히 이들의 성공이 어느 모로 보나 이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밀스러운 베일 전략, 탄생 2년 만에 화제 증폭
    「베트멍」의 인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들의 익명성과 미스터리한 아우라다. 평범한 브랜드명 뒤에 숨은 익명성은 화려한 패션계에서 오히려 돋보인다. 뎀나 그바살리아 외에 디자이너 그룹 구성원들의 사진이나 프로필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그런 이유다. 언뜻 디자이너 마르지엘라의 비밀스러운 존재감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메종마틴마르지엘라」의 비밀스러움이 브랜드 마케팅의 일환이었다면 「베트멍」이 브랜드 초반 전면에 내세운 익명성은 디자이너들의 개인적 사정과 브랜드가 만들어진 근본 원인과도 연결돼 있다. 당시 그바살리아는 「메종마틴마르지엘라」를 거쳐 「루이비통」에서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었다.

    하지만 「루이비통」에서의 디자인 작업은 그에게 점점 패션에 대한 결핍을 가져왔고 급기야 패션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했다. 마침 같은 고민을 하던 두 명의 옛 동료(「메종마틴마르지엘라」에서 만난 디자이너들)와 자신들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하고 싶은’ 패션을 하기로 했다.

    「루이비통」 출신 그바살리아, 패션에 대한 결핍 느껴
    처음에는 각자의 직장에서 일하며 퇴근 후 자신의 아파트에서 비밀스럽게 의상을 만들었고, 그것을 주변에 선물하기 위해 의미 없는 단어로 브랜드명을 만든 것이 바로 「베트멍」의 탄생 배경이다. 존재를 드러낼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콘셉트였지만 이러한 익명성이 더욱 과감하게 자신들의 스타일을 보여 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일상의 평범한 셔츠나 외투를 오버사이즈로 선보이거나 비대칭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실루엣 등으로 재해석한 의상들은 단숨에 바이어들과 셀러브리티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2014년 3월 한 아트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판매를 목적으로 선보인 「베트멍」 컬렉션은 스물다섯 벌의 의상 모두 전 세계 40여곳의 바이어에게 팔려 나갔다.

    같은 해 9월 선보인 두 번째 컬렉션이 세계적인 패션 포털 사이트 스타일닷컴(style.com)에 소개되며 이들의 이름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네 번째 컬렉션부터는 파리패션위크 공식 달력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이때부터 이미 카니예 웨스트, 리한나와 같은 셀러브리티들의 사랑을 받았다.

    평범한 셔츠와 외투, 오버사이즈와 비대칭 디자인
    처음 「베트멍」이 만들어질 당시 브랜드의 정체성과도 같던 익명성은 점점 오늘날 명품 브랜드들이 주를 이루는 패션 시스템에 대한 반기로, 스타 디자이너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반민주적인 업무 방식에 대한 도전으로 변화했다. 이제 「베트멍」을 이끌어 가는 디자이너들의 정체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뎀나 그바살리아와 브랜드 경영을 맡고 있는 그의 동생 구람(Guram)은 옛 소비에트연방국 조지아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베트멍」 디자이너 그룹에 속한 인물들은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영국, 러시아, 프랑스, 루마니아 출신인 다국적 구성원들이다. 전공 역시 패션 디자인, DJ, 사진작가, 모델, 사회학자 등 어떤 뚜렷한 스타일의 조합이라고 하기 어려운 구성이다.

    그바살리아의 이름이 리더로서 자주 언급되지만 이는 순전히 그가 「베트멍」의 첫 투자자이기 때문이다. 「베트멍」이 추구하는 익명성은 어떤 콘셉트나 아이디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그들이 입고자 하는 스타일을 제안한다는 데서 독특한 빛을 발한다.




    조지아 출신 구람 등 다국적, 다양한 직업의 인물
    그것이 모두 「베트멍」 스타일이다. 설령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의상들일지라도 말이다. 「베트멍」은 여성복 브랜드이지만 ‘여성복은 어때야 한다’는 코드에서 모두 벗어나며, 패션 브랜드의 중심에는 아트 디렉터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또한 이들에게는 없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전의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새로운 것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베트멍」의 또 다른 성공 요인으로는 이렇듯 완벽하게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여성스럽지도 않은 기이한 의상들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오버사이즈 아이템들은 여성용인지 남성용인지 구별이 안 될 뿐만 아니라 기존 여성복들이 가장 드러내고 싶어 하는 여성의 실루엣을 모두 가린다.

    드레스는 전체 의상 중에서 극히 적은 부분을 차지하며 주 아이템은 티셔츠, 스웻 셔츠, 후디, 셔츠와 외투류 그리고 청바지다. 계절감을 구분하기 어려운 의상들이 대부분이며 색상 톤 역시 밝은색보다는 무채색 계열이 많다. 이뿐만 아니라 폴리에스테르나 나일론과 같은 소재를 사용하는 데에도 거부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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