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이 만든 「캐롤리나헤레라」

    min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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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4.24조회수 9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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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디자이너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뉴욕의 패션업계에서 여성이자 베네수엘라라는 제3세계 국가 출신으로서 뉴욕 패션계를 사로잡은 디자이너가 있다. 단순히 세계적인 디자이너라는 이름표를 뛰어넘어 우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들에게 여전히 많은 영감을 주고 있는 디자이너, 바로 캐롤리나 헤레라(Carolina Herrera)가 그 주인공이다.

    제3세계 출신으로 오롯이 패션에 대한 재능 하나로만 성공한 인생역전의 스토리를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그녀의 집안은 베네수엘라에서 알아주는 명문이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녀가 유년 시절부터 오트쿠튀르 패션을 접할 기회를 열어 주었고 훗날 그녀의 컬렉션이 재키 케네디 등 상류층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마리아 캐롤리나 호세피나 파카니스 니뇨(Maria Carolina Josefina Pacanins Niño)라는 긴 본명의 그녀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의 유력한 정치인 집안 딸이다. 덕분에 13세가 되던 해에 파리의 패션쇼에 참석해 발렌시아가(Balenciaga)와 친분을 쌓았고, 처음으로 파티에서 춤을 추던 날 입은 드레스는 「랑방」의 것이었다.

    베네수엘라 귀부인이 뉴욕 패션계 주인공으로

    그러나 유년 시절 정작 그녀가 패션보다 관심이 많았던 것은 승마였다. 2명의 딸만을 안겨 주고 끝난 첫 번째 결혼 이후 1969년에 그녀는 베네수엘라의 로열 패밀리이자 당시 잡지 배너티 페어의 편집장이던 레이날도 헤레라와 결혼했다. 이때 귀족 칭호를 얻음과 동시에 헤레라의 성을 함께 쓰기 시작했다. 32세 되던 해인 1971년에 그녀는 이미 세계적인 패셔니스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전형적인 귀부인의 삶을 살던 그녀가 패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꽤나 늦은 나이라고 할 수 있는 42세 때다. 혹자는 그녀가 자식들을 다 키우고 지루해져서 패션업계에 뛰어들었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쉬울 것이 없던 그녀가 스스로도 ‘냉혹하고 쉽지 않다’라고 말하는 패션계에 불혹의 나이를 넘어 뛰어들고 또 거기서 성공을 거머쥔 것은 분명히 우연이 아니다.

    그녀의 화려한 인맥, 재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실제로 당시 그녀의 주변인 중에 왜 굳이 그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말린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패션업계에 뛰어든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녀 역시 어쩔 수 없는 타고난 디자이너다.



    명문가 딸, 42세에 패션계에 첫 도전하다

    캐롤리나 헤레라는 1981년 당시 보그의 편집장이던 다이애나 브릴랜드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클럽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였다. 성공적인 데뷔 직후 곧바로 세계적인 디자이너 대열에 오르며 1982년에는 구유고슬라비아의 엘리자베스 공주, 미국의 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영부인 낸시 레이건의 사랑을 받았다.

    미국의 또 다른 퍼스트레이디 재키 케네디 등 전형적인 상류층이 즐겨 입는 명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미셸 오바마와 스페인의 국왕비 레티시아 오르티스가 공식석상에서 즐겨 입는 브랜드로도 꼽힌다.

    그녀의 패션 커리어는 첫 컬렉션을 선보이고 브랜드를 론칭한 뉴욕에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스페인 카탈루냐의 뷰티 & 패션회사 푸이그(Puig)와 함께 비즈니스를 시작한 그녀는 의류 컬렉션뿐만 아니라 향수 등까지 성공적으로 론칭하며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재키 낸시 등 영부인이 사랑한 디자인

    그녀의 이런 성공의 비결은 단지 디자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더러 경영을 하라고 했다면 아무것도 못 한 채 사무실에 주저 앉아 울고만 있었을 것이라 말하는 그녀는 경영과 디자인을 철저히 구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패션’도 곧 ‘사업’이기에 디자이너의 아이디어가 빛나기 위해서는 팔려야 함을 주장한 것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2010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캐롤리나헤레라」의 경영자였던 캐롤라인 브라운의 경영 성적이 좋은 예다. 전임자 마리오 그라우소가 베라왕에 스카우트되어 가면서 공석이 된 「캐롤리나헤레라」의 경영자 자리를 차지한 캐롤라인 브라운.

    경영인 캐롤라인 브라운, 캐롤리나 헤레라의 반쪽(?)

    그녀는 특히 디지털 영역과 글로벌 판매 부문에서 「캐롤리나헤레라」의 입지를 다져 가며 2011년에 전년대비 무려 21%의 성장을 이끌어 냈다. 그해 「캐롤리나헤레라」 외 레디투웨어 브랜드 「CH캐롤리나헤레라」, 향수 브랜드를 모두 합친 글로벌 판매 실적은 13억달러(약 1조4569억원)였다. 패션은 혼자 이뤄 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팀의 ‘콜래보레이션’이라고 말한 캐롤리나의 이야기가 이해되는 부분이다.

    두번째 조력자 아드리아나, 향수 론칭 성공 주역

    캐롤리나 헤레라의 또 다른 사업 파트너는 바로 그녀의 여러 딸 중 막내인 아드리아나 헤레라(Adriana Herrera)다.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유년기를 ‘자유’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승마를 좋아하는 어머니와 같이 그녀도 어려서부터 동물들과 함께 지내는 삶에 익숙했다.

    뉴욕에서 패션사업을 시작한 어머니를 따라 12세 때부터 뉴요커 생활을 시작한 아드리아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처음부터 패션업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캐롤리나 헤레라의 가장 돈독한 사업 파트너인 것을 생각하면 매우 의아한 부분으로, 그녀는 대학생 때까지 ‘과학학도’였다.

    실제로 대학 졸업 후 한 대학 연구소에서 몇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본인이 선택한 전공이었음에도 뭔가 자기의 일이 아니라고 느낄 즈음 그녀는 영화 관계자들과 함께할 기회를 얻었고, 전공을 바꿔 영화 제작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가 영화 제작자로서 계속 커리어를 쌓지는 않았지만 이는 훗날 그녀의 패션사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바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스페인을 방문한 것이다.

    과학학도에서 패션계 커리어 시작한 막내딸

    아드리아나가 스페인 투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스페인의 매력에 빠지고 또 배우자로 스페인 투우사를 만나면서 「캐롤리나헤레라」와 스페인의 인연은 더욱 견고해졌다.

    결국 아드리아나는 스페인으로 완전히 이민을 가 스페인에서 「캐롤리나헤레라」의 가장 큰 브랜드 대사가 됨과 동시에 스페인 안달루시아에서 얻은 감성을 바탕으로 어머니와 함께 준비한 향수 브랜드 「캐롤리나헤레라212」를 성공적으로 론칭해 냈다.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하고 엘레강스하면서도 시크한 성격과 스타일로 아드리아나는 어머니의 패션 DNA를 가장 많이 물려받은 자식으로 통한다. 실제로 캐롤리나 헤레라는 아드리아나가 자신에게 가장 영감을 많이 주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사업 파트너로서 이들은 서로의 일에 대해 거리낌 없이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격려한다.

    우아함에서 웨어러블 RTW로 영 감성 강화
    이렇게 우아함의 대명사이던 「캐롤리나헤레라」는 웨어러블한 레디투웨어 「CH캐롤리나헤레라」를 성공적으로 론칭, 안착시키며 그녀의 기존 고객이던 상류층 부인들뿐만 아니라 젊은 여성들도 매료시키며 성장해 갔다. 여성 향수와 더불어 남성 향수도 많은 대중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성공은 아드리아나와 캐롤리나가 성공적으로 세대교체를 해내고 있으며 서로의 영감을 잘 활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여성, 또 베네수엘라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냉정한 뉴욕 패션계에서 사랑받는 디자이너로 또 많은 여성의 롤 모델로 여전히 건재한 캐롤리나 헤레라. 그녀가 제2의 캐롤리나 헤레라를 꿈꾸는 미래의 디자이너들에게 하고픈 말은 무엇일까?
    여성이었기에 오히려 여러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하는 캐롤리나, 사업뿐만 아니라 가정도 함께 보살펴 가며 슈퍼 우먼이 돼야 했던 그녀는 무엇보다 패션을 사랑하고 또 여성 스스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아름다움을 찾으라고 이야기한다. 삶과 패션을 사랑한 디자이너, 바로 캐롤리나 헤레라다.

    **패션비즈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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