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br>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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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⑥

Monday, Apr. 10, 2023 | 외고, mizkim@fashion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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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또는 운명(?) 와세다에서 日 편집숍으로!

실존주의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일찍이 “Life is C(Choice) between B(Birth) and D(Death). 인생은 B(탄생)와 D(죽음) 사이의 C(선택)다”라는 말을 남겼다. 설익은 지식인 흉내를 내던 젊은 시절에는 나도 여느 실존주의자들처럼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며, 내 삶의 방향키는 나 자신이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생은 B(탄생)와 D(죽음) 사이의 C(chance), 즉 우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우연한 발견과 발명이 인류 운명을 바꾼 사례는 차고 넘치게 많다.  

일례로 ‘황금이 흘러 넘치는 땅’ 인도를 찾아나선 콜럼버스는 우연히 아메리카에 도착했고(그가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라고 믿었다는 슬픈 이야기는 뒤로하고), 영국의 미생물학자 플레밍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중 우연히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바쁜 현대인들의 아침을 해결해 주는 콘플레이크 역시 밀반죽을 적정 시간보다 오래 숙성하는 바람에 탄생한 우연의 산물이다.  신문 도서 소개란에서 ‘우연히’ 눈에 띄어 읽었던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의 저자 플로리안 아이그너도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기업의 성공과 개인사까지 우연이 개입하지 않은 사건은 없다고 결론 맺는다. 패션계에서 15년째 살고 있는 인문학자인 나 역시 이 의견에 격하게 공감한다.  

2002년 1월 나는 일리노이대학교 인문학 박사학위에다 초등학생이 된 두 딸과 ‘bun in the oven(내가 좋아하는 영어 표현 중 하나로 ‘오븐 속에 구워지고 있는 빵 하나란 의미’다. ‘임신했다’라는 말을 귀엽게 비유한 것이다)’을 가지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양가에서는 박사학위보다 아들이라는 ‘빵’을 품고 귀국한 것을 더 기뻐했다.  

그해 3월 서울대학교에서 학부 수업과 대학원 수업을 시작했다. 문제는 세 번째로 불어나고 있는 내 배였다. 오븐 속의 빵이 어찌나 잘 자라는지 인정사정없이 부풀어 오른 배는 어느새 남산만 해졌고 무서울 정도로 아래로 쳐졌다.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아들의 무게에 배를 카트에 싣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 같은 배를 안고 6월 15일 수업을 마치고, 20일 성적을 제출하고, 21일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일부러 일정을 이렇게 맞추라고 해도 못 맞출 정도로 ‘우연하게’ 모든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들었다.  

여름 방학 동안 몸조리를 짧게 끝내고 8월 말부터 두 번째 학기의 강의를 시작했다. 3시간짜리 박사과정 수업을 위해 최소 열 시간 이상 준비를 했다. 이런 열정 덕분인지 학기마다 수업 규모가 두 배씩 성장해 가르치는 보람이 쏠쏠했다. 타고난 학습자인지라 장시간 수업 준비하는 것도 힘들지 않았고 공부한 것을 가르치는 것은 더 재미있었다. 학생들도 잘 따라 줘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수업이나 학문이 아니라 교수 자리를 ‘밥그릇’으로만 보는 대학의 관행과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학계 문화였다. 당시만 해도 경제력이 있는 남편을 둔 여자가 서울대 인문학과에서 자리를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힘들었다. 설사 자신의 실력으로 교수가 돼도 “먹고살 만한 사람이 왜 남의 밥그릇을 빼앗느냐?”라는 직간접적인 언사에 ‘구차하기 싫어’ 그만둔 실력 있고 학문을 사랑하는 여자 선배를 여럿 보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 즈음 가족들과 함께 일본 여행을 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또 다른 우연을 만났다. 카다카나와 히라가나로 쓰인 귀여운 일본어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일본식 온천, 후지산, 온갖 맛난 일식들, 도쿄대와 와세다대 등 모두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꼬물꼬물 장난스레 쓰여 있는 카다카나와 히라가나는 눈을 감아도 아른거릴 만큼 예쁘고 귀여워서 꼭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관련 학원을 찾아가 새벽반 등록을 마쳤다. 어찌나 열심히 공부했던지 7개월 만에 비즈니스 반까지 올라가는 작은 성과도 이뤘다. 그런데 가볍게 시작한 일어 공부가 어느새 일본 문화에 대한 흥미로 발전해 있었다. 단순히 언어에서 그친 게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정신세계를 알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와세다대학교 객원 연구원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패션회사를 창업한 지인의 SOS를 받게 됐다. 도산공원 에르메스 건물 뒤쪽에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편집숍을 오픈할 예정이니 그 공간을 채워 달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황했지만 지인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당시 패셔니스타로 불리던 한 연예인과 온라인 편집숍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중도하차하면서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으로 방향을 틀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발 벗고 도와주려 하는데 컬렉션이 문제였다.  

세계 5대 컬렉션은 뉴욕을 시작으로 런던, 밀라노, 파리, 도쿄 순으로 이어진다. 지인의 부탁을 받을 당시에는 모든 컬렉션이 끝나고 도쿄컬렉션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유럽과 미국 브랜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일본 브랜드는 사카이와 꼼데가르송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다. 바잉을 위해 서둘러 5년 치의 갭 프레스(Gap press) 도쿄 컬렉션판을 구매해 벼락치기에 들어갔다. 1차 적으로 컬렉션이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는 브랜드를 추려낸 후 최종적으로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선별해 각 회사에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패션 히스토리도 없고 숍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 좋은 브랜드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다. 가서 직접 부딪히는 것이다.

일본으로 날아가 GVGV, 토가(Toga), 리미푸(Limi Feu, 요지 야마모토의 딸), 미하라야스히로(Mihara Yasuhiro), 그린(Green), 민트디자인(Mintdesigns), 파드칼레(Pas de Calais), 존로렌스설리반(John Lawrens Sullivan) 등 당시 핫하다는 브랜드는 거의 만나봤다. 그런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이 없었다. Toga, Limi Feu 같은 인터내셔널한 브랜드에서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고, 특히 의사결정권자인 오너나 디자이너들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어가 아닌 일어로 브랜드 담당자를 설득해야 했다. 각 브랜드 담당자를 만날 때마다 ‘내가 꼭 바잉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반복적으로 설명하다 보니 어느새 일어가 일취월장했다. 와세다대학교에서 비교문화·문학을 위해 공부했던 일본어가 일본에서 편집숍에 필요한 컬렉션을 바잉하기 위해 쓰이게 된 것이다.  

이 과정 어디에 나의 Choice(선택)가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은 그저 Chance(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우연에 우연이 쌓여 운명이 된다’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사르트르의 공식을 이렇게 바꾸고자 한다. 인생은 B(탄생)와 D(죽음) 사이의 C(우연)이며, C(우연) + C(우연) = D(destiny 운명)이다. 그러니 우연히 성공했다고 우쭐댈 것도, 우연히 실패했다고 자책할 것도 없다. 삶에 겸허하게 되는 이유다. 우연이든 선택이든 긍정적인 결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에 대한 성실함과 끈기가 기본이 돼야 할 것이다.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3년 4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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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 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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