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 l 마혼코리아 대표
의식의 변화는 함께하는 '소통’에서 온다
가품 판매, 디자인 카피, 상표 무단 도용 등은 패션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다. 브랜드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참 속상한 일이다.
온라인 마켓의 성장과 함께 위조 상품 신고와 제보 건수가 급증하면서 단속이 더욱 강화되고 제재 및 형사처벌 관련 법 개정이 추진 중이다. 하지만 만들고 파는 사람들만 단속하는 것으로 개선이 될까? 현행법상 가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사람만 처벌하게 돼 있어 구매하는 사람에게는 그 심각성이 크게 와닿지 않는 듯하다. 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모두의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
스페인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의 일이다. 1학기 초, 대형 로펌 변호사들이 클래스마다 두 명씩 들어와서 2장 분량의 시험지를 나눠주었다. 다들 어리둥절하며 시험지를 받아 들고 문항을 확인했다. 곧 여기저기서 실소가 픽픽 터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경제학 수업 교재에 대한 마틴의 태도로 올바른 것은?
① 이미 같은 수업을 들은 친구에게 책을 물려받는다. ② 다른 반 친구에게 책을 빌린다. ③ 친구의 교재를 복사해서 교재를 준비한다. ④ 피디에프(PDF) 스캔본을 구한다. ⑤ 서점에서 책을 산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2번, 2번!’ ‘난 4번!’ 하고 외쳐대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웃었다. ‘뭐지? 대학원 첫 학기에 이런 초등학생용 시험은?’ 두 명의 변호사는 학생들의 짓궂은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문제 풀이를 시작했다.
“여러분 중에 누군가는 석사 과정을 끝내고 박사 과정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큰 기회 비용을 감수하고 공들여 책을 한 권 내게 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그 책을 사람들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구매하는 게 아니라 스캔본을 구하고 복사를 해서 쓰고 서로 빌리다 보면 과연 누가 ‘수업 교재로 쓰일 만큼 양질의 지식이 담긴 책’을 쓰려고 할까요?
책 한 권에는 저자의 노고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대가를 지불하고 교재를 사는 것은 그 책 한 권을 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책 한 권의 가격은 책 자체의 가치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누군가에게 학문에 열정을 쏟을 수 있도록 하는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합니다.
나의 소소한 바른 행동 하나가 누군가의 권리를 보호하고 존중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합니다.”
낄낄대며 웃던 초반의 분위기는 사라졌다. 매우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 당연한 이야기를 공론화해서 변호사의 입을 통해, 시험 문항을 통해 생각해 보게 되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공교롭게도 이 수업 전, 학생들 사이에서 제본이나 피디에프 스캔본 교재가 제법 돌았다. 수업 후 교재를 공유하는 행위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한 학기가 지날 때마다 정식 교재를 구매하는 학생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신기한 변화였다.
마땅히 그리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을 ‘거기까지’ 하게 된 결과였다. 의식의 변화는 ‘함께하는 소통’에서 온다.
우리 패션 업계에도 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모두의 생각을 ‘거기까지’로 터주는 소통의 장이 조금 더 다양해지면 좋겠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규칙을 지키는 내 행동 하나가 원작자의 권리를 보호함과 동시에 멋지고 창의적인 제품이 더 많이 시장에 나올 수 있는 밑거름이 되며 단속과 처벌보다 더 강력한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 profile
•현 Mahon Korea 대표
•현 Golden Egg Enterprise 대표
•동원그룹, LG전자, 한솔섬유 근무
•스페인 IE Business School MBA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2년 7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패션비즈를 정기구독 하시면
매월 다양한 패션비즈니스 현장 정보와, 패션비즈의 지난 과월호를 PDF파일로 다운로드받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패션비즈 정기구독 Mobile버전 보기
■ 패션비즈 정기구독 PC버전 보기
- 기사 댓글 (0)
- 커뮤니티 (0)



.jpg&w=1080&q=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