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젠린(王健林) 완다그룹 회장,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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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2.28조회수 8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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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세를 거스르지 말고 따르라”



    1968년 중국에서 군인 이야기를 다룬 최초의 영화 <린하이쉐위안(林海雪原)>이 상영됐고 이 영화를 관람한 15살짜리 소년은 앞으로 군인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시만 해도 훗날 이 소년이 중국의 갑부로 성장할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 소년이 바로 왕젠린(王健林)이다.

    1980년대 149만 위안의 부채를 안고 있던 기업이 지금은 백화점, 영화관, 관광 산업, 문화 · 창의 산업의 다크호스로 성장하고 심지어 글로벌 M&A까지 진행하는 회사 완다그룹으로 발돋움했으나 사업 초기만 해도 왕젠린은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중국 경제의 급성장 기회를 잘 잡고 발전한 그는 “사업을 하려면 대세에 거스르지 않고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왕젠린은 군생활 18년 동안 중국 북부의 변방을 지키는 일반 군인에서 단(團)급 간부까지 성장했다. 1986년 중국 군부대에서 진행된 군축 정책 ‘100만명 감군’에 순응해 제대한 왕젠린은 다롄(大連) 시강(西崗) 구 인민정부 판공실 주임으로 부임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는 “당시 상황에서 계속 남아 구장, 부시장까지 올라갔다고 해도 나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 사업 첫걸음부터 나아간다
    그해 그 시절은 그에게 인생을 바꿀 기회를 선사했다. 시강 구 정부는 부채로 파산 위기에 몰린 다롄시강구주택개발공사를 누군가가 맡아 주기를 원했다. 당시 왕젠린 외에 감히 나설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이 회사에는 직원이 20여명뿐이었고 회사 건물이 거의 허물어야 할 정도로 허름했을 뿐만 아니라 사무실 아래에 보일러실이 있어 창가와 창문에 석탄 먼지가 두껍게 깔려 있었다. 이런 회사에서 그는 총경리직을 맡게 됐다.

    열악한 환경도 왕젠린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중국 개혁개방이 10년 차 되던 해인 1988년에 중국 정부는 농촌 개혁을 마친 후 경제 체제 개혁 방안을 더욱 심화해서 진행하도록 비준했다. 이 기회를 빌려 왕젠린은 다롄완다그룹(大連萬達集團)을 설립했다.

    1989년 완다그룹은 다른 부동산업자들이 수익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해 거절한 ‘베이징제(北京街) 구도심 재건축 사업’을 맡았다. 당시 왕젠린은 “개발도 하지 않고 어떻게 수익이 날지 안 날지 알 수 있어”라며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당시 완다 아파트는 창문이 달린 거실과 화장실 채택, 알루미늄 창호 사용, 모든 세대에 방범 도어 설치 등으로 주택 구조가 개선돼 다롄에서 최고가로 분양됐다. 이는 1980년대 중국 동북 지역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재건축 사업 양식을 통해 완다는 부동산 개발 업계에서 브랜드로 발전해 나가게 됐다.




    사업 전환: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는다
    왕젠린이 정부 관리에서 기업가로 변신한 후 몇 년 사이에 완다는 다롄 부동산 업계의 선두 주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우연한 일을 통해 사업을 전환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왕젠린과 함께 창업에 뛰어든 원년 멤버 2명이 있는데 한 명은 암에 걸렸고 한 명은 간 질환을 앓게 됐다. “건강보험이 없던 시대라 회사에 돈이 있으면 치료가 가능했고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왕젠린은 그들에게 치료비 300여만위안을 쾌척했다.

    그는 돈은 아깝지 않았으나 이번 일로 큰 계시를 얻게 됐다. “회사가 앞으로 20년, 30년 발전하면서 직원이 점점 많아질 텐데 질병으로 앓게 되는 직원이 많으면 어떻게 할까?” 한 가족의 가장과 같은 걱정에서 출발해 완다의 사업 전환이 이루어지게 됐다. 끊임없는 현금 흐름을 보장하기 위해 완다가 집을 짓고 임대료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완다 상업 부동산의 초기 모습이다.

    당시 선양(瀋陽)의 상업 부동산 사업을 돌이켜보면서 왕젠린은 “3년 동안 소송만 222회 진행했다”고 토로했다. “당시 매일 회사에 출근해서 하는 일이 소송에 대처하는 일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전했다. 당시 그는 5년 후에도 똑같이 소송만 해야 한다면 부동산 사업을 아예 접는 편이 낫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뜻밖에도 완다그룹은 부동산 사업을 접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 사업을 점점 확장해 나갔다. 그럴 수 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전국 시장을 겨냥해 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선전(深圳)을 시찰하면서 시장화 개혁을 추진할 것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중국에는 창업 열풍이 불었으며 특히 남부 연해 지역의 창업 열기가 가장 높았다. 왕젠린은 또 한 번 대세를 따랐으며 “규모를 크게 키우려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1993년 완다는 남쪽 지역인 광저우(廣州) 판위(番禺)로 사업을 확장해 차오궁위안(僑宮苑) 사업을 개발하면서 중국 최초로 타지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 부동산 개발 업체로 부상했다.

    그 후로 완다그룹은 청두(成都), 창춘(長春) 등 지역에서도 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대규모로 전국 각지 부동산 시장에 진출했다. 1998년 아시아 금융 위기 후에 중국 경제 형세는 또 한 번 전환기를 맞이했다. 2000년 5월 완다그룹은 주택 부동산 사업에서 상업 부동산 산업으로 전환하고 ‘수주 부동산’과 ‘도시종합체’의 사업 양식을 구축할 것을 확정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쭌이(遵義)회의’를 개최했다.



    새로운 기점: 문화 · 창의와 글로벌 발전을 선호한다
    완다그룹이 전국 시장에서 글로벌 시장으로 더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왕젠린 개인의 담력과 기백, 매력이 그대로 표현됐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중국의 대외 개방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2005년 완다그룹은 위안시엔(院線, 중국의 영화관 체인)에서 출발해 문화 산업에 대규모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2009년 완다그룹은 창바이산(長白山)리조트와 우한(武漢)중앙문화구역 투자 사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Han Show와 무비 파크 등 세계적인 문화 사업을 구축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20여년이 된 왕젠린은 문화 · 창의 사업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2013년 완다그룹은 더 큰 규모의 완다문화관광타운을 여러 도시에서 선보인 한편 세계 최대의 영화 산업 단지인 칭다오(靑島) 둥팡잉두(東方影都)를 오픈했다.

    통계에 따르면 2013년 말까지 완다위안시엔은 중국 전역의 73개 도시에서 142개 영화관, 1247개 스크린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완다그룹은 매출액 40억2300만위안 중 6억위안 이상의 이윤을 기록했다.

    왕젠린은 시종일관 사업 발전의 대세에 순응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반드시 해외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 또한 리스크를 분산해야 한다. 한 바구니에만 계란을 모을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그는 밝혔다.

    2012년 초 완다그룹은 글로벌 발전 전략을 실행했다. 같은 해 9월 완다그룹은 미국 AMC시어터스를 26억달러에 인수해 전 세계 최대의 극장 체인으로 우뚝 섰다. 그 후 영국 최대 호화 요트 업체 선시커(Sunseeker)를 3억2000만파운드에 인수했으며 런던, 시드니, 시카고, 마드리드, 로스앤젤레스, 골든코스트 등을 비롯한 세계 주요 도시에 완다호텔을 투자, 건설했다.

    2013년 완다그룹은 자체 지적재산권을 보유한 문화, 관광, 상업을 총망라한 초대형 종합체 사업을 선보였다. 2014년 완다상업부동산과 완다영화관은 성공적으로 상장했고 텐센트, 바이두(百度)와 함께 세계 최대의 O2O 그룹을 구축했으며 새로운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패션비즈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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