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조병하 l 전 신세계사이먼 대표 '삶의 별것들에 가볍게 살아야 한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봄기운도 느낄 겸 트레킹 전문 여행사를 통해 아내와 함께 트레킹을 다녀왔다. 오전 분량의 트레킹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됐다. 여행사에서 예약해 놓은 지역 맛집에서 일행과 함께 코다리찜으로 맛난 점심을 먹었다. 우리와 함께 합석해서 점심을 먹게 된 일행은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곱게 늙은 노년의 부부였다. 예약을 해 놓은 덕분인지 금방 매콤한 코다리찜이 나왔다.
맛있는 점심을 함께 먹던 중 아내는 내게 너무 매운 것 아니냐며 동의를 구했다. 평소 매운 것뿐만 아니라 세 가지(없어서 못 먹는 것, 안 줘서 못 먹는 것, 비싸서 못 먹는 것)만 빼고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내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중간에 식당 이모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뜨거운 미역국을 한 그릇씩 나눠 줬지만 아내는 받지를 않았다.
맞은편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시던 노부부 중 아내분이 내 아내에게 ‘맵다면서 왜 미역국을 드시지 않느냐’며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했다. 아내는 웃으며 ‘미역국을 안 먹을 건데 괜히 받아두고 버릴까 봐 그런다’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부부의 남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점잖게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그런 거까지 알아야 돼?”
그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목소리가 매우 다정해서 그 어른이 아내의 오지랖을 핀잔을 준 것인지, 아니면 농담을 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입이 맵다는 아내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근처 편의점을 찾았는데 마침 가게가 휴무였다.
하지만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을 때 그 노부부가 느티나무 아래 의자에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그 말이 농담이었다고 확신했고,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며칠 후 <유퀴즈> 재방송을 보고 있던 아내가 그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재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효리의 남편 이상순이 개를 좋아한다며 내게 눈빛으로 공감의 대답을 요구했다. 조금 전까지 인터넷에서 찾은 영화를 TV에 연결해 <오필리아>(2021)를 함께 보고 난 후 커피를 내리려 부엌으로 가던 중 아내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보, 내가 그런 거까지 알아야 돼?” 금방 그 말뜻을 이해한 아내가 폭소했다.
가끔은 커피를 내리려 부엌으로 왔다가 내가 왜 부엌에 왔는지 모를 때가 있다. 하지만 가끔은 10년 전 서산 개심사에 놀러 갔을 때 아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생생할 때가 있다. 그처럼 우리의 기억은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뇌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기억할 수 있는 용량이 안 되기 때문에 선택적 기억이 더욱 효율적이다.
어떤 기억이 좋았으면 추억이고, 어떤 기억이 나빴으면 좋은 경험일 뿐이다. 하지만 굳이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내 기억할 필요는 없다. 아름다운 추억만 기억하기에도 뇌는 선택적 기억을 할 만큼 버겁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에서 해방될 때만 행복이 보인다. 아무리 자책하더라도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아무리 걱정하더라도 미래는 바꿀 수 없으니까. 인생 뭐, 별것 없는 삶이 별것이 되려면 그런 별것들에 가볍게 살아야 한다. 스스로 사색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5년 5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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