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넘버21과 알렉산드로 델라쿠아'
이탈리아 편의 마지막 이야기로, 부침이 심하기로 유명한 브랜드 ‘넘버21(N°21, 넘버투애니원)’과 그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델라쿠아(Alessandro Dell'Acqua)에 대해 총 2회에 걸쳐 들려주고자 한다. 넘버21은 바이어이자 패션 관계자로서 관심이 많이 갈 수밖에 없는 브랜드다. 재능 있는 디자이너의 아픈 사연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2008년에 나는 ‘알렉산드로 델라쿠아’의 재킷 핏에 반해 바잉한 적이 있다. 이 브랜드는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델라쿠아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브랜드다. 포멀한 검정 재킷은 마치 ‘패션계의 철학자’로 불리는 디자이너 후세인 샬라얀(Hussein Chalayan)의 재킷만큼이나 예뻤다.
그런데 얼마 후 이 디자이너는 펀드(회사의 돈줄)에 자기 브랜드를 빼앗기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진짜 있나 싶겠지만, 지난 호에서 살펴본 하쉬(Hache)의 사례처럼 이탈리아에는 이런 일이 왕왕 일어난다. 한마디로 계약 해지를 당한 것이다. 펀드가 사실상 브랜드의 주인이니, 디자이너의 이름이 달려 있든 없든 합법적으로 디자이너를 쫓아낼 수 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0년, 이탈리아 해외 영업 사원인 지인이 새로운 브랜드가 있으니 꼭 한 번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녀가 나에게 소개한 브랜드는 다름 아닌 알렉산드로 델라쿠아가 새롭게 론칭한 넘버21이었다. 브랜드 이름에 포함된 ‘21’은 알렉산드로의 생일이며, 또 나폴리탄 스몰피아(Neapolitan Smorfia)에 있는 라 도나 누다(La Donna Nuda 누드 여인)를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하다(나폴리탄 스몰피아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와 그 주변 지역에서 널리 퍼져 있는 전통적인 미신적 숫자 해석 시스템으로, 이 시스템은 숫자와 그에 따른 상상력 키워드 사이의 관계를 사용해 꿈, 이야기, 혹은 일상적인 사건을 해석한다). 즉 숫자 21은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기존 알렉산드로 델라쿠아의 절제된 라인을 좋아했던 나는 큰 기대를 하고 넘버21의 디자인을 살펴봤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디자인이 과했다. 지나치게 강렬한 원색, 퍼프 소매가 과장된 두꺼운 실크의 핑크색 원피스 등 색깔도, 핏도, 소재도 모두 과했다. 알렉산드로가 자기 브랜드를 잃어 정신적 충격이 컸던 나머지 이런 컬렉션을 내놓았나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가격도 비싸서 국내 소비자를 위해 바잉할 수 있는 아이템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저력 있는 디자이너는 달랐다. 밀라노를 넘어 전 세계에서 핫한 쇼룸 중 하나인 ‘리카르도 그라시(Riccardo Grassi)’와 계약한 후 넘버21의 컬렉션은 매 시즌 일취월장했다. 이 정도 급의 쇼룸 뒤에는 커다란 펀드가 늘 대기 중이다. 펀드와 함께 쇼룸을 운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 흥미로우면서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시스템이다. K-패션 업계가 점점 커가고 있고 K-쇼룸의 영향력도 확대되는 만큼 이탈리아인의 이런 시스템을 눈여겨보고 연구해 볼 만하다.
리카르도 그라시는 매우 유명한 쇼룸이어서 전 세계 내로라하는 바이어들은 다 찾아간다고 보면 된다. 바이어(또는 어카운트) 리스트를 한번 살펴보면 뉴욕은 버그도프 굿맨(Bergdorf Goodman), 삭스 피프스 에비뉴(Saks Fifth Avenue), 노드스트롬(Nordstrom), 니만 마커스(Neiman Marcus), 블루밍 데일스(Bloomingdale's) 등이 있다. 파리는 르봉 마르셰(Le Bon Marché), 갤러리 라파예트(Galeries Lafayette), 프렝탕(Printemps) 그리고 일본은 이세탄(伊勢丹)과 다카시마야(高島屋) 등이 있다. 한국은 한섬의 편집숍인 톰그레이하운드와 무이, 신세계의 분더샵과 엑시츠, 롯데의 엘리든, 삼성의 비이커 등이 있다.
이런 멀티 쇼룸은 상당히 널찍한 공간에 브랜드들을 배치해 둔다. 패션업계 관계자라면 아주 잘 알겠지만, 고객의 이목을 끄는 위치는 판매와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런 멀티 쇼룸은 펀드와 손잡고 전략적으로 키우는 브랜드를 메인 룸에 널찍하게 배치하고, 브랜드 로고는 ‘대문짝’만하게 메인 벽에 붙인다. 그 외 아이템의 판매액과 판매율은 백화점 매장에서 판매를 담당하는 매니저의 역량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쇼룸도 마찬가지다. 쇼룸이 직접 하는 브랜드니까 해외영업사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밀겠는가. 모든 유명 백화점과 편집숍에서 어떤 브랜드가 눈에 띈다면 전 세계적으로 무조건 뜬다고 보면 된다. 왜 한 시즌에 모든 편집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새로운 브랜드가 똑같이 소개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는가? 같은 시기에 이 브랜드를 바잉하자고 편집숍들이 다 같이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쇼룸에 가서, 같은 해외영업사원에게 같은 브랜드를 강력히 추천받고 바잉해 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쇼룸은 차근차근 그 브랜드의 어카운트를 늘리다가 이 브랜드가 잘된다 싶으면 펀드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면 컬렉션의 퀄리티뿐 아니라 규모가 적어도 4~5배 이상 커진다. 2012년의 넘버21도 어마어마하게 성장해서 정말이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같은 기간에 리카르도 그라시에서 키우는 브랜드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MSGM’이었다. MSGM 컬렉션 역시 4~5배 이상 커져 있었다. 하지만 MSGM은 성장한 건 둘째치고 과한 아이템들이 많아 바잉할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반면 넘버21 컬렉션의 성장은 바이어로서 눈물이 날 만큼 빛났다. 그 큰 컬렉션에서 바잉하고 싶은 아이템이 80~90%일 정도로 아주 훌륭했다. 누가 바잉하든 잘될 것이 분명했다.
바잉 후 나는 돌아오자마자 모든 백화점 바이어들에게 이 브랜드는 누가 국내 파트너가 되건 무조건 입점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전개할 수 있는 역량이 된다면 내가 직접 바잉하고 싶었지만 미니멈이 워낙 컸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백화점 바이어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게 추천했던 이유는 한국에서 넘버21의 매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넘버21의 아이템 중 특히 눈여겨본 것은 니트였다. 알렉산드로 델라쿠아가 캐시미어 전문 브랜드인 말로(Malo)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만큼 적당히 여성스러우면서도 적당히 시크하고, 딱히 패셔니스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웨어러블한 디자인이 많았다. 특히 무심한 듯 목뒤로 나오는 핑크빛 라벨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저격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2010년 초반 당시 넘버21은 알렉산드로 델라쿠아가 자신의 이름을 달고 있던 브랜드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롭게 자각한 자유와 지식이 잘 반영돼 있었다. 넘버21은 남성복에서 빌려온 트릭과 디테일을 곁들인 모던하고 여성스러운 컬렉션을 선보였다. 남성스러운 셰이프와 소재의 믹스, 여기에 여성스러움이 더해져 브랜드의 핵심 스타일 코드를 이뤘다.
이렇게 저력 있는 디자이너의 아름다운 컬렉션을 보여주는 브랜드가 우리나라에서는 파트너사의 이런저런 사유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4년 LF와 2018년 리앤한(LEE&HAN)을 거쳐, 이번 2024 F/W부터 코오롱FnC가 전개한다고 한다. 이렇게 파트너사가 연속 바뀌며 국내에서 브랜드 이미지는 많이 손상됐고, 라이선싱 또는 한국 ‘온리(Only)’로 전개된 아이템들이 끼어들며, 컬렉션의 퀄리티에도 의문이 생겼다. 코오롱이 어떻게 풀어낼지가 관심을 모은다.
브랜드 하나를 뺏고 뺏기는 일이야 우리나라에서는 일상다반사지만, 넘버21만큼 부침을 많이 겪은 브랜드는 흔치 않다. 다음 호에서 그 이야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패션업에 종사하는 우리가 반성하고 깨우칠 점은 없는지 짚어 보고자 한다.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백치외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 스토리(RHK)
· 패션MD : Intro(RHK)
· 패션MD1:바잉편(21세기 북스)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칼럼제목 : 도스토옙스키 문학으로 본 21세기)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바잉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및대학에서 패션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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