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패션계 거장 칼 라거펠트 별이 되다!

    이영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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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21조회수 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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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계가 큰 슬픔에 빠졌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진가, 최근에는 전시를 통해 조각가로도 활동하며 예술 전반에 걸쳐 활발한 자취를 남겼던 칼 라거펠트가 2월19일 오후 85세(만)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췌장암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는 2월18일 월요일 저녁에 파리 근교 병원에 입원해 다음날 임종했다.

    최근 그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2019년 S/S 샤넬 오트 쿠튀르 쇼 피날레에 불참하기도 했다. 라거펠트는 1983년 1월 열린 자신의 첫 샤넬 쇼 데뷔 무대 이후 한번도 패션쇼 피날레 불참 사례가 없었던지라 일각에서는 그의 후임자를 거론하기도 했다.

    지난 1983년부터 샤넬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영입돼 36년간 브랜드를 이끌며 화려하게 디자이너의 길을 걸어온 그는 자신만의 유니크한 룩과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이며 여성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를 키워냈다. 이번 비보에 세계적인 프렌치 럭셔리 그룹 LVMH의 오너 베르나르 아르노는 “무한히 슬프다”며 그는 자신의 “친애하는 친구”이자 “천재적인 크리에이티브”라고 AFP통신을 통해 추모했다.

    또 다른 럭셔리 이탈리안 브랜드 펜디에서도 아티스틱 디렉터로 일한 그는 임종 직전까지 컬렉션을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펜디도 보유한 아르노 회장은 “패션과 문화계는 위대한 영감을 잃었다. 그는 파리를 세계적인 패션 캐피탈로 만드는데 기여했으며 펜디를 가장 혁신적인 이탈리안 브랜드 중 하나로 탈바꿈시켰다”고 덧붙였다.

    베르사체의 도나텔라 베르사체도 “당신의 천재성은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이 됐으며 특히 지아니(사망한 도나텔라의 오빠로 베르사체 창업자)와 나에게 그랬다. 우리는 항상 당신으로부터 배웠고 당신의 대단한 탤런트와 무한한 영감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인스타그램에 추모의 글을 올렸다.

    독일 출신의 칼 라거펠트는 포니 테일로 묶은 성성한 백발에 검정 뿔테 선글라스와 하이 칼라 화이트셔츠, 강한 캐릭터의 반지와 목걸이로 인상깊다. 무엇보다도 록앤롤 후작같은 그의 독특한 외모는 그야말로 별도의 장식이 필요없는 캐릭터 그 자체로 스스로 다양한 상품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화려한 장례식은 사절

    샤넬, 펜디, 자신의 브랜드 칼 라거펠트까지 세개의 브랜드를 이끌어온 그이지만 무엇보다도 칼 라거펠트라는 이름은 캄봉가에 본사가 위치한 샤넬과 가장 가깝게 회자된다. 그는 샤넬의 클래식 트위드 수트와 퀼티드 백을 재해석해 지속적으로 브랜드 코드를 변화시키며 신선하게 이끌어내 그 명성을 드높였다.

    브랜드 설립자 가브리엘 샤넬 여사가 살아있었다면 ‘시샘할 정도의 재능’을 지닌 그다. 특유의 나르시즘과 ‘카이저(Kaiser)’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의 카리스마를 지녀 패션뿐 아니라 문화계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미친 라거펠트의 타계 소식은 단순히 패션계만의 애도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삶을 산 그는 특히 천장이 유리로 장식된 유서깊은 파리 ‘그랑 팔레(Grand Palais)’를 주무대로 자신만의 환상적인 스타일의 독창적이고 거대한 규모로 패션쇼를 선보였다.

    특히 지난 가을 선보인 2019 S/S 컬렉션 패션쇼는 실제 바닷가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스케일의 모래사장 무대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센 강둑의 북 스토어를 옮겨놓은 듯한 패션쇼나 숲 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의 무대 장식을 선보인 샤넬 패션쇼는 소셜 네트워크에 회자되며 크게 히트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칼 라거펠트는 그의 정확한 생일에 대해서 미스테리로 남기고 싶어했다. 공식 자료들에 근거해 여러 독일 프레스들이 밝힌 그의 생일은 1933년 9월10일로 알려졌다. 생전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출생년도를 바꿨다”며 2013년 파리-매치(Paris-Match)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1935년생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나치 독일 치하에 시골지역에서 풍요롭게 자란 그는 1950년대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이후 그의 커리어는 1954년 인터내셔날 울 세크리테리아트(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 대회에서 이브 생 로랑과 함께 1등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60년대 초반에는 독립적인 디자이너로 일했고 어느 순간 여러 메종들과 콜래보레이션을 시작했다. “나는 최초로 자신의 브랜드가 아닌 브랜드에서 이름을 알린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고용인 멘탈리티로 일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변화를 따르는 시대적인 감각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2004년에는 스웨덴의 패스트 그룹 H&M 캡슐 컬렉션을 디자인하기도 해 이후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그를 따라 콜래보레이션을 진행했다. 세개의 브랜드를 아우르며 연간 12개의 컬렉션을 진행, 일 중독자로 연이은 컬렉션을 소화해 냈던 그는 또한 사진 작업에도 열정을 가져 샤넬 캠페인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1983년 샤넬과 프랑스 출신 모델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현재 자신의 브랜드 오너)와 익스클루시브 광고 계약을 맺었으며 독일 출신 크라우디아 시퍼, 영국 출신으로 지금은 영화배우로도 활약하는 칼라 델레바인, 조니 뎁과 바네사 파라디의 딸 릴리-로즈 뎁까지 브랜드 캠페인 모델로 기용하는 등 많은 슈퍼 모델들을 배출해내기도 했다. 한편 칼은 패션계가 모델의 신체적 다양성을 주장할 때 여전히 슬림한 모델을 선호했다.

    2009년 독일의 ‘포커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무도 무대에서 둥근 몸매의 여성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마른 모델이 별로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스낵을 먹고 있는 뚱뚱한 여성들이다”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스스로도 에디 슬리먼의 남성복 디올 옴므 슬림 슈트를 입기 위해 수십킬로그램을 감량해 다이어트에 성공한 후 실제로 디올 슬림 수트를 입고 레드 카펫에 출현해 많은 프레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타계 전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다른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단호한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뉴메로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몇년 전 작고한 프랑스 국민 가수 조니 할리데이같이 파리 마들렌에서 성대히 진행된 국민장을 원하는지 질문에 대해 “끔찍하기 짝이 없다. 장례식은 없을 것이다. 그냥 죽을 것이다”라며 “마치 야생숲에 사는 동물들처럼 그냥 사라지고 싶다”라고 프랑스3TV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WWD에 의하면 지난 30년간 그를 보좌했던 샤넬 패션 크리에이션 스튜디오팀의 디렉터 버지니 비아가 칼 라거펠트의 후계자로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을 이어갈 것이 유력하다. 가브리엘 샤넬과 칼 라거펠트의 영광은 계속될 것이다.

    1,사진 - 칼 라거펠트
    2, 사진- 1954년 인터내셔날 울 세크리테리아트 대회에서 이브 생 로랑과 함께 1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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