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딘 알라이아 세 번째 전성시대

    groove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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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1.15조회수 16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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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아제딘 알라이아(Azzedine Alaia)의 시대다. 1980년대와 2000년대에 이어 그는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2014 S/S 파리패션위크 기간에 맞춰 파리의 의상장식박물관인 팔레 갈리에라(Palais Galliera)에서 대대적인 전시를 하고 파리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면서 30주년을 맞아 하우스의 새로운 도약을 패션계에 알렸다.

    그의 뒤엔 세계 3대 명품 그룹 리치몬드가 있다. 물론 그는 누구에게도 왕좌를 내어 준 적이 없다. 지난 50여년간 같은 일을 하며 여성의 몸을 가장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드레스 메이커로서 자신의 패션 세계를 굳건히 지켜 왔다. 싸구려 옷, 카피캣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고고한 학처럼 자신을 지켜 온 그의 진정한 가치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하고 있다.

    지금 세계 유명 편집숍과 백화점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떤 공룡 명품 기업도 아닌 살아 있는 전설 아제딘 알라이아의 컬렉션이다. 편집숍 10코르소코모(10 Coroso Como)의 오너이자 현재 이탈리아 보그 편집장의 친언니인 ‘카를라 소차니(Carla Sozzani)’는 “여성들은 그의 옷을 입으면 아름다워 보이고, 편하고, 존경받는다고 느낀다.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라고 말했다.



    1980년대, 2000년대 이어 30주년 새로운 도약

    카를라 소차니는 알라이아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패션계 인사 중 한 명이다. 소차니 외에도 알라이아에 대한 업계의 찬사는 끝이 없다. 당대의 가장 인정받는 패션 저널리스트인 수지 멘키스와 캐시 혼 역시 “이전에 없던 최고의 쿠튀리에” “여성의 몸에 관해선 논쟁의 여지가 없는 대가”라며 각각 알라이아에게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수지 멘키스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서 25년간 활약한 후 최근 보그의 인터내셔널 에디터로 자리를 옮겼고, 캐시 혼은 올 초까지 15년간 뉴욕 타임스 패션 섹션의 안주인 역할을 한 바 있다. 가장 날카롭고 까다로운 패션 리뷰로 대표적인 에디터들이다.

    동료 디자이너들의 존경도 한 몸에 받는다. 15년간 「발렌시아가」 하우스를 부활시킨 뒤 「루이뷔통」으로 자리를 옮기며 화제가 된 디자이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는 “살아 있는 전설인 알라이아와 내가 친구라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라고 했다. 심지어 약 7년간 알라이아를 인수했던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 역시 알라이아가 자신의 히어로라고 했을 정도.

    카를라 소차니와 절친, 수지 멘키스와 캐시 혼도 찬사

    이유는 무엇일까. 패션이 너무 가벼워진 데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디자이너는 많아졌지만 감동을 주는 컬렉션은 찾아보기 어렵다. 패스트패션이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중간 마켓이 사라져 갔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바뀐 지 오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너무 넘쳐난다.

    디자이너들은 한 해에 너무 많은 컬렉션을 치른다. 속도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고, 창의적인 프로세스가 간과되기 시작했다. 창조성이 부족하다고 느끼니 런웨이에 대한 기대도 자연스레 점점 줄어든다. 업계에서는 1990년대 미니멀리즘 이후 새로운 패션의 탄생이 없었다고 말한다.

    런웨이의 룩들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뿌려지고, 며칠 사이에 카피돼 거리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됐다. 패스트패션 컴퍼니에 카피할 만한 소스를 제공하는 것이 레디투웨어 디자이너의 역할이 돼 버린 것 같다. 빠른 성장과 이윤을 위한다면, 브랜드 고유의 아이덴티티와 끝내 주는 컬렉션을 위한 노력도 줄어든다.

    세계 3대 명품 그룹 리치몬드 소유한 디자인 하우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으로만 컬렉션을 접한 이들이 너도나도 컬렉션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패션위크 기간에는 쇼장 안보다 오히려 쇼장 밖이 더 시끄러워졌다. 쇼의 콘텐츠보다 쇼를 보러 온 사람들의 옷이 더 관심거리다. 아주 많은 사람이 패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진지한 고민은 줄어들었다.

    이제 와 이런 변화에 대한 찬반논쟁은 무의미하다. 이미 부인할 수 없게 세상이 그렇게 됐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했고 세대가 달라졌고 그들이 패션을 소비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변화를 인정하고 반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 아닌가.

    괜찮다. 다행히 패션은 가만히 있을 줄을 모른다. 언제나 현실에 대한 반응 혹은 반항으로서 무언가를 일으키지 않던가. 그리고 우리의 눈은 다시 ‘진짜’에 목말라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패션계가 진짜 디자이너, 살아 있는 전설, 디자이너 위의 디자이너, 아제딘 알라이아를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된 이유다.



    런웨이 환상 사라진 카피캣 세상서 ‘마이웨이’

    아제딘 알라이아는 1939년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보그를 보며 패션에 대한 꿈을 키웠고 미술학교인 에콜데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이 시기에 인체에 대한 이해를 얻었고 인체 위에 조각하듯 작업하는 방식을 형성해 나가기도 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누이와 함께 드레스 메이커로 돈을 벌며 스스로 그 재능을 발견했다.

    1957년 파리로 넘어와 「크리스티앙디오르」 「기라로쉬」에서 경험을 쌓은 후 「티에리뮈글러」에서 일했다. 귀부인 고객들을 위한 드레스 메이킹 작업을 하다가 1979년 주변의 권유로 작은 캡슐 컬렉션을 만들었다. 검은 가죽 위주에 투박한 부자재를 사용해 터프한 분위기를 준 이 컬렉션은 파리 상류층 여성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1년 처음으로 그의 레디투웨어 컬렉션을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늘 푸른 재킷을 입고 다니며 스트리트패션을 촬영하는 것으로 유명한 뉴욕 타임스의 저널리스트 빌 커닝햄이 당시 WWD에 「아제딘알라이아」를 입은 여성들을 소개하며 크게 주목받았다.

    튀니지 → 파리로, 조각 → 패션 ‘진짜 디자이너’

    이후 뉴욕의 유명 백화점 버그도프굿맨과의 독점 거래를 통해 1982년 9월 뉴욕에서의 첫 쇼가 성사됐다. 당시 가격으로 700달러 선이던 드레스가 이틀 만에 5만달러어치나 팔려 나갔고, LA의 유명 스토어 ‘맥스필드(Maxfield)’도 그의 컬렉션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돈이 아닌 옷을 주는 조건으로 톱 모델들을 모두 불러모으며 관심을 끈 첫 번째 파리 쇼를 연이어 선보였고 1983년 회사를 설립하게 됐다. 이후 프랑스 매거진 에디터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소개되며 레이블의 명성이 높아졌고, 알라이아의 쇼는 1980년대 파리패션위크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가 됐다. 1980년대 후반엔 비벌리힐스 뉴욕에 스토어를 열었고, 미디어와 세일즈를 모두 잡으며 첫 번째 전성기를 보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오며 비즈니스가 주춤하기 시작했다. 파리의 오트쿠튀르는 명성을 잃어 갔고, 패션의 중심은 파리에서 밀라노로 옮겨 가고 있었다. 이라크전이 일어났고 경기는 쇠퇴했다. 알라이아는 사랑하는 누이를 잃은 뒤 패션계를 떠난 것처럼 보였고, 뉴욕 소호 스토어의 문을 닫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 고객들을 위한 작업은 계속 해 나갔다. 이때부터는 패션위크 스케줄이 아닌 자기만의 페이스로 비즈니스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프라다 그룹 이어 리치몬드 투자로 비즈니스 확장

    조용하던 시기가 지나고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알라이아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프라다 그룹에 모든 지분을 매각하고 든든한 서포트를 받으며 패션계로 돌아왔다. 2007년부터는 리치몬드 그룹의 투자를 받으며 비즈니스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리치몬드는 「까르티에」 「반클리프&아펠」 「끌로에」 등을 소유해 LVMH, 케링(Kering, 전 PPR)과 함께 세계 3대 명품 기업으로 불린다.

    회사 설립 30주년인 2013년은 그의 커리어에 세 번째 전성기를 가져온 중요한 해다. 1월에 그는 BPI(Beaute Prestige International)와 향수 & 코스메틱 계약을 맺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이는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다른 럭셔리 하우스들이 모두 향수와 메이크업으로 수입을 올리는 동안에도 알라이아는 올곧은 장인처럼 드레스 메이킹에만 전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라이아는 「장폴고티에」 「이세이미야케」 등 디자이너 향수를 오랫동안 제조해 온 BPI가 자신의 세계를 잘 해석해 줄 것이라고 믿고 만족한다고 밝혔다. 9월에 열린 2014 S/S 파리패션위크에서는 온통 알라이아로 화제였다. 패션위크 기간에 맞춰 파리 의상장식박물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시작됐다.

    2013년 BPI와 조인, 향수 코스메틱 론칭 화제

    그동안 자신이 원하는 때에 종종 컬렉션을 소개한 것과 다르게 패션위크 기간에 레디투웨어 쇼를 진행했으며 파리에 최초로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총 3층 1320㎡ 규모의 이 플래그십 스토어는 지난 20년간 작업장, 쇼룸, 쇼장, 스토어의 역할을 모두 했던 마레 지구 알라이아 메종의 느낌을 그대로 재현했다.

    늘 한 발짝 떨어져서 조용히 고수로 남아 있을 것 같던 알라이아가 2013년을 기점으로 이렇게 본격적으로 ‘확장’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아제딘알라이아」를 소유한 리치몬드 그룹은 개별적인 수치는 밝히지 않았지만 2013년 괄목할 만한 매출 성장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약 70여명의 직원이 벌어들이는 연매출은 6575만달러(약 723억원), 순익은 604만달러(약 66억원)로 추정된다.

    그의 명성에 비하면 컴퍼니의 연매출이 그리 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매출의 절대치보다 중요한 것은 알라이아 같은 비즈니스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연 66억원의 순수익을 올린다는 사실이다. 디자이너의 고집으로 가장 자신답게 컬렉션을 운영하면서도 세일즈와 미디어를 모두 잡을 수 있고, 꾸준히 그 자리를 유지해 왔으며, 그리고 진짜 디자이너에 대한 갈망이 있는 지금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 알라이아의 레디투웨어 컬렉션과 슈즈, 핸드백 등 액세서리는 파리의 2개 직영 스토어와 뉴욕의 ‘버그도프굿맨’ ‘바니스뉴욕’, 밀라노의 ‘10코르소코모’, 파리의 ‘콜레트(Colette)’, 런던의 ‘도버스트리트마켓(Dover Street Market)’ 등을 비롯 전 세계 300개 이상의 스토어에 입점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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