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손 가진 세계 패션 슈퍼 리치들 ③
    日 최고 재벌 야나이 타다시「유니클로」회장

    조태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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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4.18조회수 17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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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승 9패 신화 만든 카리스마 경영자
    「유니클로」로 대표되는 패스트리테일링 야나이 타다시 회장 겸 사장. 그는 지난해 일경 비즈니스 편집부에서 조사한 ‘일본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100인’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세계적인 경기불황 속에서 역으로 구세주 역할을 하는 「유니클로」를 만듦으로써 일본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으로 선정된 것이다.

    미국 잡지 포브스에 따르면 지난해 야나이 타다시 사장의 추정재산은 133억달러(약 15조4000억원)로, 세계 갑부 랭킹 66위에 올라가 일본에서 최고 부자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2009년 총재산 61억달러(6조6000억원)로 일본 재벌 1위로 등록된 이후 2011년 76억달러(8조2000억원), 세계 랭킹으로는 122위, 지난해 88위, 올해 66위로 순위는 계속 올라가는 양상이다.

    글로벌 시대, 수많은 글로벌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의 국경 없는 경쟁 속에서 그는 토종 일본 브랜드를 가지고 어떻게 억만장자가 된 것일까. 특히 모든 글로벌 브랜드가 다 들어와 있다는 일본, 아시아 시장 확장으로 그는 단기간에 화려한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가 경영하는 「유니클로」를 통해 그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그 원인과 비결을 알아본다.





    재산 15조4000억원, 세계 랭킹 66위에
    야나이 사장이 만든 일본 최고 패스트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는 지난 1984년 1호점 오픈 후 1991년 본격적으로 체인점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대단해보이지만 초기 시절은 초라했다. 첫 매장 오픈 후 도쿄에 진출하기까지 7년의 시간이 걸렸고 1998년 도쿄 하라주쿠에 오픈한 후 플리스 상품이 빅 히트를 치면서 급성장했다. 이 붐은 2001년까지 계속됐고 이때 비로소 매출 4000억원을 초과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플리스 인기 하락과 동시에 야나이 사장의 타 사업 확장 실패로 인해 실적이 악화, 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자리를 물러나고 새로운 사장으로 교체됐다. 이후 본래 컨셉과 다른 디자인 기능을 내세웠지만 매출이 더욱 하락했다. 결국 2005년 야나이 사장이 복귀하면서 철저한 경영 철학과 해외 진출 전략을 내세워 실적을 회복했다.

    히트 상품(브라톱, 도레이사와 합작한 히트텍 등)을 연속 배출, 대박으로 이어지면서 일본 국내 의류 상품 판매 1위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일약 전 세계 패스트 패션 브랜드 4위로 껑충 뛰어올랐으며 향후 2020년에는 매출 5조엔 달성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아버지 회사 25세 중역, 35세 사장으로 취임
    야나이 사장은 대학 졸업 후 그의 아버지가 추천한 저스코그룹(현재의 이온 리테일)에 입사해 가정 잡화 매장을 담당했지만 일에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는 9개월 만에 퇴사한 후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 오고오리상사의 신사복 매장에 입사했다. 점점 아버지의 회사에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입사 2년 후인 25세 때 회사의 중역을 맡게 됐다.

    아오야마나 아오키 같은 교외형 신사복 매장이 급부상하는 데 비해 이 신사복 브랜드는 야나이 사장이 입사할 당시 12년 된 숍으로 후발 주자였다. 신사복 매장은 접객을 하지 않으면 잘 팔리지도 않았고 회전율도 낮았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점점 소규모화돼가는 신사복보다 고객층에 한계가 없는 캐주얼웨어에 장래성을 느끼고 저렴한 가격으로 일상적인 캐주얼 의류를 판매하는 것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뭔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이 매장에서는 캐주얼웨어를 중심으로 해외에서 사입한 상품도 판매했는데 원가나 경비를 늘려 새롭게 매장을 오픈해도 그다지 매출이 오르지 않았다. 특히 여성복은 트렌드 사이클이 너무 빨라 그나마 몇 개 더 오픈했던 매장들도 폐점과 오픈을 반복했다.


    셀프 판매+저가격 ‘헬프 유니셀프’ 1호점 대성공
    이러한 시절을 기반으로 35세 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84년 오고오리상사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가끔 해외 출장 때 미국의 리미티드, 넥스트 같은 대형 체인점을 보고 많은 자극을 느꼈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 대학생들이 자주 이용하는 가게의 접객 없는 셀프 서비스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못 보던 사업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접객을 통해 무조건 물건을 팔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는 사람을 먼저 생각한 매장, 자신이 좋아하는 상품을 골라 계산대에 직접 가서 사고 나오는 매장, 이런 스타일로 캐주얼웨어를 판매해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셀프 서비스 판매, 고객 요구에 대응한 매장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는 확신이 섰다. 「유니클로」의 좌우명 ‘헬프 유니셀프’ 형식을 고안해낸 것이다. 그 후 매장 이름은 대형 창고라는 의미도 들어 있는 유니크 클로딩 웨어 하우스(Unique Clothing Warehouse)라고 정하고(이후 줄임말이 「유니클로」가 됨) 사장으로 취임한 1984년 히로시마에 1호점을 오픈했다.

    중심 가격은 1000엔과 1900엔으로 정했다. 1호점 오픈 전 벌인 TV, 라디오 광고와 상점가나 학교 주변에 오픈한다는 전단지 등 판촉 전략은 대성공했다. 오픈 당일 아침 6시부터 시작해 입장을 제한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몰렸고 연일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당시 셀프 판매와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아주 매력적인 포인트를 제공한 것이다.






    ▶ 성공비결 1
    자체 상품 제작 & 프랜차이즈로 매장 확장
    초창기 「유니클로」는 위탁 판매 중심으로 다른 도시로 점점 매장을 늘려 그 영역을 넓혀갔지만 자금 조달력이 나빴고 순이익률도 낮았다. 그만큼 리스크 방지를 위해 결국 소비자는 비싼 돈을 주고 상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리테일 사업에서 가격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별주 방식(자체 기획 상품을 메이커에 제조 위탁하는 형식)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상하이 부근 공장을 경영하던 사람들이 중국 본국에서 홍콩으로 이주해 홍콩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아주 싼 가격으로 공장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홍콩 메이커들은 유럽 브랜드 상품을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면서 리테일 사업을 했는데 대표적인 회사가 「지오다노」였다. 야나이 사장은 「지오다노」의 CEO를 직접 찾아가 만나 그의 비결을 듣고 1988년 3월 홍콩에 상품 바잉 사무소를 만들고 홍콩 사람과 조인한 현지 회사를 세웠다.

    홍콩에 설립한 회사에 어패럴 생산 관리 경험자가 입사하면서 팀을 만들고 이들을 중국에 주재시켜 직접 대량의 오리지널 상품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점점 노하우가 생긴 야나이 사장은 상품 거래량을 늘렸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시에 매장 수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1986년 처음으로 FC(프랜차이즈)를 모집하고 사업을 비약적으로 볼륨화하기 위해 ‘면적 165㎡(50평)~264㎡(80평)에 연매출 2억엔 매장 가능’이라는 캐치카피로 PR을 하면서 2, 3호점을 순조롭게 오픈시켰다. 4년 후 1990년대 초 연간 매출은 20억엔(약 200억원)을 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체인 사업을 확장해 매장 수를 점점 늘려 일본 전역으로 퍼졌다. 아이치켄, 후쿠오카켄, 효고켄, 사가켄, 기후, 구마모토현을 기점으로 매장 수를 늘려갔다.






    ▶ 성공비결 2
    저가의 고품질 상품 대량 생산으로 ‘날개’ 달다
    새로운 상품 기획을 위해 1995년 도쿄에 새로운 사무실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수도권 중심으로 매장을 오픈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1998년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하라주쿠에 매장을 오픈했다. 전국 기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당시 무엇보다 매출에 큰 공헌을 한 대표적인 상품이 플리스이다.

    플리스의 대성공으로 인해 야나이 사장의 도전과 꿈은 점점 커졌다. 플리스는 타 브랜드와 차별화하는 전략으로 저렴한 가격을 위해 중국 공장 경영자와 「유니클로」의 생산 관리로 시작된 파워아이템. 도레이의 재료(인도네시아의 실)를 구입해 중국에서 원단 제작, 염색, 봉제해 코스트를 절감할 수 있는 목적으로 스타트했다. 도레이의 재료(저가의 고품질), 공장(대량 생산)과 생산 관리자(봉제 및 품질 향상) 체제와 마케팅, 생산 물류 체제까지 정비함으로써 고품질과 저가격의 가능성을 실현한 것이다.

    하라주쿠점은 10~20대 여성 고객이 중심으로 이때부터 패션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 민감한 여성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게 됐다. 이후 「유니클로」는 90년대 초반 51억엔(약 590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1999년 1110억엔(약 1조3000억원), 경상이익은 41억엔(약 473억원)으로 성장했다.


    모노즈쿠리의 장인 프로젝트 철저한 품질 관리
    9년 만에 매출은 약 22배로 성장했고 매장 수는 217개에서 368개까지 늘었다. 그 결과 1200만장 판매를 계획한 플리스는 2000년 추동 2600만장 판매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기록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다쿠미(장인) 프로젝트’이다. 생산, 물류, 판매까지 자사에서 전부 컨트롤하는 대량 생산 체제를 정비, 효율은 높이고 쓸모없는 것은 제거해 가격과 품질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목적으로 만든 프로젝트다.

    섬유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한 일본에는 점점 기술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곳이 없어졌는데 이러한 기술자들을 지도자로 임명해 중국 상하이, 광저우 지역에 관리 사무소를 만들어 상주시켰다. 150명이 넘는 다쿠미팀(생산 관리 담당자)으로 하여금 매주 공장을 방문해 전 공정을 체크하며 생산 기획을 조절하게 했다.




    ▶ 성공비결 3
    기업 아이덴티티 명확히 전달한 프로모션
    「나이키」 등 다수 기업 상품을 히트시킨 광고회사 와이덴 케네디(WIEDEN KENNEDY, 이하 W&K)와의 조인은 야나이 사장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다. 바로 존 제이(JOHN C.JAY)와의 만남이 그것. 그의 캐치프레이즈 카피와 잡지, 지하철 내, TV CM 광고는 플리스가 대성공한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광고는 광고주가 정하는 것이지 크리에이티브나 광고 대리점이 정하는 게 아니다. 광고주가 정말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크리에이터이고 적절한 매체를 써서 광고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광고에서 전달할 가장 큰 포인트는 “「유니클로」는 모든 사람에게 품질 좋은 캐주얼웨어를 입을 수 있게 하는 일본 기업이다”라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전달하는 것.

    야나이 사장이 생각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가 존 제이에게 요구한 것은 “옷에 개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옷을 입는 사람이 입는 방법에 따라 처음으로 개성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것.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광고와 마케팅에 본격적으로 돈을 투자했다.


    「나이키」 성공시킨 와이덴 통해 가치 전달
    와이덴 케네디는 프로모션 강화, 「유니클로」의 생각을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지금까지 신문 등 전단지 광고가 아니라 신문의 1면 광고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광고 전개방식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광고는 「유니클로」의 브랜드 인지도와 기업 이미지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이 광고로부터 「유니클로」를 알았던 고객층은 55.4%, 그해 12월은 76.7%로 상승했다. 또 TV CM에서 저렴한 가격뿐만 아니라 멋있고 세련된 이미지를 부각시켜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광고는 젊은이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다. 유명 뮤지션은 물론 홉킨스 박사부터 초등학생까지 등장시켜 수많은 장르의 사람들을 「유니클로」 고객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 성공비결 4
    해외 진출로 ‘재팬 퀄리티’ 글로벌 브랜딩
    2001년 9월 런던에 첫 해외 매장을 오픈했지만 적자로 인해 매장망 축소, 2002년 9월 중국 상하이에 진출했지만 현지 경쟁 상품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져 4년 만에 적자 발생, 2005년 브랜드 인지도 부족으로 미국 진출 실패. 이때 얻은 교훈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얼마나 아픈지 실감하지 않으면 성공에 필요한 것을 절대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고품질 베이직이라는 브랜드 컨셉을 기점으로 글로벌 플래그십을 오픈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브랜딩화가 필수불가결하다. 2006년 사토우 가시와를 기용해 뉴욕 소호에 「유니클로」의 강한 이미지 전략을 명확히 전달해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동시에 브랜드 포지셔닝도 높아졌다.

    그 후 2007년 런던, 2009년 파리, 2010년 상하이에 다시 도전해 일본의 퀄리티를 어필한 브랜딩 전략은 대성공. 특히 중국의 성장 스피드는 아주 놀라웠고 여기 맞춰 계속 오픈을 가속화했다. 이로 인해 해외 사업 매출은 약 1600억원을 달성했다. 이것은 아시아 전체 매출의 80%에 해당된다. 콜래보레이션 등을 통한 상품과 일본 애니메이션 등이 프린팅된 T셔츠 브랜드 「UT」 런칭, 유명 배우들을 기용하거나 외부 유명 디자이너 등과 제휴한 프로모션 기획을 위해 과감히 투자했다. 그 결과 화제성을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만큼 집객력은 뛰어났으며 그 가치는 충분히 실적으로 연결됐다.





    ▶ 성공비결 5
    타사와의 파트너십으로 새로운 마켓 창출
    2003년쯤 도레이와의 파트너십을 통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돈 벌기 구상이 시작됐다. 「도레이」의 연구 개발과 기술력, 「유니클로」의 상인 정신과 머천다이징, 마케팅력의 융합이다. 야나이 사장이 항상 말했던 「유니클로」의 본래 컨셉인 저가격, 고품질 상품은 도레이 같은 섬유 전문 메이커가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

    도레이와 전략적으로 파트너십을 맺고 프로젝트 팀을 세워 타 패스트 패션 브랜드와 차별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면 이너 상품 중심이었던 「유니클로」는 기능성 이너 상품이 필요하다는 강한 의지가 출발점이 돼 개발한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바로 히트텍이다.

    발열, 보온, 보습, 향균, 정전기 방지, 형태 보존, 스트레치라는 7개의 부가가치 기능을 가진 고기능 이너로 이전까지 고기능 이너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마켓을 창조했고 입소문을 타고 엄청난 판매를 기록했다. 전 세계에서 히트텍은 누계 판매 장수 약 3억만장, 착용 경험이 있는 사람 중 80%가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 입고 있으며 2011년에 과거 최고 기록인 약 1억만장을 판 빅히트 상품을 만든 것이다.





    카리스마 야나이 “성장한다는 것은 살아남는 것”
    야나이 사장이 이끈 「유니클로」의 성장 원동력은 도전 그 자체이다. 가격과 품질, 상응하는 두 진실들을 어떻게 하면 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느냐,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보다 빨리 캐치해 니치 시장을 겨냥해 상품화시키는가 즉 브랜딩화시키느냐, 이 정신은 도전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또 문제에 부딪히면 그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방안을 찾기 위해 파고들어 우수한 인재를 발굴해 키운 다음 그에게 전적으로 맡긴다. 의욕이 있는 사람을 끌어주고 그만큼의 가치를 제공한다. 이와 더불어 끊임없이 신규점 오픈을 가속화하는 것이 그의 성장의 근본이다.

    상품의 질을 높이는 장인 기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게 있어 ‘상인정신’을 발휘하는 것, 개개인이 좀 더 윤택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사회 전체가 더 좋아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벌지 않으면 안 된다는 투철한 상인정신이 있다.


    투철한 ‘상인정신’ 다음 히트작 「GU」 대기 중?
    특히 일본 국내는 보호된 산업, 높은 코스트 구조, 세계에서 활약하는 인재가 적은 것이 문제라며 이러한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그는 글로벌 사업에 눈을 돌렸고 초기에는 실패했지만 브랜드력을 키워 다시 도전했다. 실패 속에서 성공을 캐치하고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감지하면 전진하는 야나이 사장. 그는 항상 높은 목표를 갖고 계속 성장한다는 이념을 항상 사내에 발신한다.

    그래서 그는 카리스마 경영자로 불린다. 최근 그는 「유니클로」의 넥스트 브랜드로 「GU」(예전「g.u」)를 글로벌화해 ‘유니클로화’시킨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또 한번의 붐을 일으킬 수 있을지 세간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야나이 사장의 성공스토리는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지 기대해본다.


    **패션비즈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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