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손 가진 세계 패션 슈퍼 리치들 ②
    패션전략의 천재 아르노 LVMH그룹 회장

    aura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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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4.11조회수 1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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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 마음 사로잡는 럭셔리 왕국 건설





    “프랑스 사람들은 상품을 살 때 이 상품이 내 라이프스타일에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가를 생각하고 구매한다.” “나는 꿈을 파는 상인이며, LVMH는 소비자들에게 꿈을 꾸게 만든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의 말이다. LVMH의 브랜드 철학은 스토리텔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히 좋은 상품이나 멋진 이미지 마케팅만이 아니라 상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품을 사는 순간을 꿈에서 현실로 만들어내는 LVMH그룹은 일종의 문화를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럭셔리를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고 럭셔리 산업화의 선봉에 선 LVMH그룹. 매출규모 281억유로(약40조7000억원, 2012년)로 전 세계 럭셔리 시장의 15%를 차지하는 LVMH그룹에는 비즈니스 전략가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 회장이 있다. 프랑스 왕실 귀족의 오트쿠튀르를 태평양 건너 아시아 중산층에 보급시킨 그는 전 세계의 ‘취향 메이커’이고 그의 기업은 M&A를 통해 60여개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는 럭셔리 제국이다.


    럭셔리 자이언트 리더, 세계 10위, 유럽 두번째 부자
    아르노 회장은 전 세계 10위, 유럽 최고 부자로 포브스 추산 290억달러(32조원, 2012년)를 가진 갑부다. 그는 지난 2011년 세계 갑부 4위에서 최근 「ZARA」 창업자 오르테가 등 패스트 패션의 급성장으로 인해 순위가 좀 밀리기는 했지만 명실공히 여전한 유럽의 대표부자다. 그를 최고 갑부에 오르게 해준 LVMH는 작년 주식이 약 135억달러 올랐다. 이는 중국과 베트남 등 신흥 아시아 시장의 명품 붐에 힘입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비상하고도 과감한 M&A 전략으로 전 세계 럭셔리 시장을 제패한 럭셔리 자이언트 LVMH 수장이다. 최근 미국시장의 침체와 유럽 경기 하락에 따라 다시 전 세계 패션시장에 M&A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베르나르 아르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는 한때 야비한 기업사냥꾼이라는 따가운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20년간 패션 세상을 지배하는 그의 능력과 안목에 대해서는 이제 이의를 다는 기업도, 사람도 없다. 이런 면에서 베르나르 아르노의 패션왕국 설립 역사와 그의 치밀한 전략들을 훑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부동산 사업가 집안 자제로 출생 32세 가업 계승
    베르나르 아르노는 북프랑스의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가업인 부동산 개발사업을 계승해 경영했다. 32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팜비치에서 20층 콘도를 짓는 사업을 진행했다(1982~1984년). 미국에서의 부동산 개발사업은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그는 빌딩에 디자인을 입혀 팔았을 때 이에 열광한 부자들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부자들의 니즈와 그로 인한 부가가치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다.

    큰 배움이었다. 그러던 중 1984년 고국에서 부삭의 파산소식을 접했다. 부삭의 「크리스티앙디오르」는 아르노가 평소 눈여겨봤던 브랜드였다. 부삭은 2차 대전 후 사상 최대 규모로 파산했고 회장은 사기죄로 기소된 상태에서 정부가 개입해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었다. 아르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귀국했고 기업인수 플랜을 세웠으며 부삭의 이사진에 접근해 로비했고 투자자들, 정부 사회주의 인사들까지 부삭 인수에 필요한 친분을 쌓았다.

    부삭 이사진의 협의서를 제일 먼저 얻어낸 것은 아르노였다. 자금은 부친에게 1500만달러를 빌렸고 파트너 기업의 4500만달러를 모집해서 마련했다. 드디어 1984년 그는 부삭을 인수했다. 부삭이 인수한 핵심 브랜드 「크리스티앙디오르」는 아르노가 럭셔리 비즈니스에 발을 디딜 수 있었던 초석이었다.


    파산한 부삭 인수로 「크리스티앙디오르」 보유
    2년 후 파산 직전의 부삭은 아르노의 약속대로 흑자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아르노 회장은 9000명의 직원을 해고했고 「크리스티앙디오르」와 봉마르셰백화점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문을 5억달러에 매각했다. 반발이 심했다. 정부 관리들은 직원 고용보장을 조건으로 부삭을 인수하게 했다고 증언했지만 아르노 회장은 자신이 약속한 것은 단 한 가지, 회사를 흑자전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후에 가장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은 「크리스티앙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 마크 보앙(Marc Bohan)을 해고했을 때였다. 이브생로랑 이후로 30여년간 디자이너였던 마크 보앙은 별다른 사전 예고 없이 해고됐다. 한편으로는 「크리스티앙라크루아」 패션하우스를 새롭게 런칭하는 데 투자했다. 라크루아는 천재적인 예술성을 지녔지만 수년간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아르노의 발탁으로 새 생명을 부여 받은 셈이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럭셔리 비즈니스의 권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89년 LVMH그룹을 인수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LVMH의 회장이 됐는지 그 역사적인 사건은 매우 흥미롭다(136p 박스 기사 참조). LVMH그룹이 아르노 회장의 수하에 들어간 것은 「루이뷔통」과 모에헤네시 두 회장 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에서 비롯됐다. LVMH는 「모에 떼 샹동」 「헤네시」 「돔 페리뇽」 「크리스티앙」 향수를 소유했던 모에헤네시와 「루이뷔통」 「지방시」 향수, 「뵈브 클리코」를 소유한 작은 규모의 루이뷔통사가 1987년 합병으로 다시 태어났다. LVMH는 당시 파리 주식시장에서 6번째로 큰 회사가 됐다.





    럭셔리 첫발 2년에 흑자전환 → 40세 패션왕국 건설
    이후 LVMH사가 아르노의 수중으로 들어오는 1989년까지 LVMH 인수전은 프랑스 기업사에서 가장 크고 치열한 기업전쟁으로 기록됐다. LVMH 양측의 경영권을 둘러싼 숨 막히는 자존심 대결에서 제3자인 아르노 회장이 승리한 것이다. 이 사건은 패밀리 기업의 경영권이 어떻게 자본가에게 넘어가는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의 꿈이 10년 먼저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이미 아르노는 「크리스티앙디오르」의 부삭(Boussac Saint Freres textile group)을 인수했을 때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럭셔리 기업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사람들은 그저 젊은이가 야망이 크다고 생각했을 뿐 아무도 40세에 LVMH그룹의 회장이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비즈니스에서 성공의 비밀은 기회를 잡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패밀리기업 시대에서 전문경영인 시대로, 이제 다시 자본가의 시대로 산업이 변하고 있었다. 아르노 회장은 치명적인 오명을 썼다. “그의 얼굴은 만화주인공 틴틴(tin tin)이지만 사실은 기업 사냥꾼, 캐시미어를 쓴 늑대, 비윤리적 미국식 자본가”라고 프랑스 언론은 비판을 퍼부었다.


    “기업 사냥꾼?” “난 미국식 경영 스타일 사업가”
    아르노 회장은 자신에게 악명을 안겨준 LVMH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은 “무자비한 자본가가 아니라 긴 안목의 사업가로 보여지고 싶다”고 언급했고 “그 일에 개의치 않는다. 단지 미국식 새로운 경영스타일을 실행한 것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10년 안에 럭셔리 브랜드 숫자는 감소할 것이고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브랜드의 힘을 모아야 했던 것이다”라고. 그는 핵심 브랜드들의 자연스러운 실적성장 이외에도 M&A를 통해 몸집을 불리는 성장을 지지하는 비즈니스맨이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LVMH 인수전을 통해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그는 다시 전쟁을 치러야 한다면 이번에는 언론보도에 좀 더 신경을 써서 늑대라는 오명을 쓰지 않겠다는 것과 둘째는 적대적 인수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호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이며 슈발리에, 라카미에 회장은 이를 너무 늦게 알게된 옛 시대의 경영인이라는 것이다.





    중국, 인도 넘어 이제 몽골까지 아시아로 진군
    LVMH의 확장은 최근 아시아와 신시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국에는 지난 1992년 처음 「루이뷔통」을 개점했다. 당시는 길거리에 자동차도 없고 자전거만 다니던 시절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럭셔리 소비 강국으로 변모했다. 「루이뷔통」 매장도 45개가 넘는다. 신흥 아시아 시장의 진출은 2009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까지 이른다.

    몽골의 「루이뷔통」 매장은 작년에 이미 흑자를 기록했다. 「루이뷔통」 「크리스티앙디오르」는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뮤지엄에서 전시를 하고 그들의 역사를 보여준다. 지난해 10월에는 LVMH가 오픈 하우스도 개최했다. 상품과 와인이 만들어지는 장소들, 장인의 워크숍이나 포도원 등의 25곳을 오픈해 헤리티지를 선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LVMH가 이끄는 새로운 시도다. 소비자에게 다양한 경로를 통해 LVMH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고 소비자와 소통하는 것.


    전년비 매출 19%, 순익 28% 상승 놀라운 실적
    LVMH의 최근 실적도 경이롭다. 2012년 매출이 전년 대비 19% 증가한 281억유로(약 40조7000억원), 순익은 전년 대비 28% 증가한 39억900만유로(약 5조6000억원)를 기록했다. 중국의 소비파워와 시계, 주얼리 부문의 매출증가로 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치열해진 럭셔리 시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브랜드로 「루이뷔통」 「에르메스」 「샤넬」을 공통적으로 꼽는다.

    LVMH그룹은 전 세계 럭셔리 시장의 15%를 차지하고 있고 멀티브랜드 전략으로 「루이뷔통」 「펜디」 「지방시」 「셀린느」 「겐조」 「도나카란」 「마크제이콥스」를 비롯해 가죽패션 부문의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다. 더불어 「모에 떼 샹동」 「헤네시」 「돔페리뇽」 등 주류, 「태그호이어」 「불가리」 등 시계 주얼리, 「겔랑」 등 화장품과 향수 멀티숍 세포라, DFS면세점 등 리테일까지 60여개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으며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럭셔리 제국의 대표를 이어가고 있다.







    비즈니스전략1.

    수공예를 상업화해 ‘가치’ 만들다
    그의 비즈니스 전략의 가장 중요한 것은 수공예를 상업화(브랜드 확장 → 민주화 대중화 → 국제화 글로벌화)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 럭셔리 비즈니스는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장인이 공방에서 한 땀 한 땀 손수 지은 수공예품이었다. 1854년에 개점한 「루이뷔통」은 왕실과 귀족의 여행트렁크를 수공예로 만드는 상점이었고 1837년에 마구와 말안장을 만들었던 「에르메스」, 1847년 금세공업자 및 주얼리 상인 「카르티에」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비즈니스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다. 가족 또는 전문경영인이 나서 브랜드 자산을 활용해 이를 상업화했다. 「루이뷔통」은 창업자 아들인 가스통 뷔통과 손녀사위인 앙리 라카미에의 진두지휘하에 트렁크 외에 저렴한 가격대에 「루이뷔통」 브랜드를 부착한 핸드백, 스카프까지 ‘브랜드 확장(Brand Extension)’을 했고 ‘머스트 해브’ 상품이라는 광고와 마케팅으로 수익을 거둔다.

    1997년에 마크 제이콥스를 디자이너로 기용하면서 기성복 의류와 신발, 연이어 시계를 런칭했다. 「루이뷔통」은 앙리 라카미에가 맡으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둔다. 1976년 그가 맡을 당시 상점은 프랑스 파리와 니스 2개밖에 없었지만 해외시장 개척을 통해 1987년에는 20여개국에 135개 점포를 가진 글로벌 상점으로 탈바꿈했고 매출은 2000만달러에서 10억달러로 50배 커졌다. 60~70년대를 지나면서 중산층의 소비력이 증가했고(민주화/매스패션화), 1980년대에는 경제적 비상으로 일본시장의 역할이 컸다(국제화/글로벌화).

    최근에는 1992년 중국시장 첫 진출 후 명품 붐으로 최대 수혜를 받고 있다. 2009년 몽골에 점포를 개점하는 등 신흥 아시아시장 진출에 주력하고 있다. 동시에 유럽과 미국의 부유해진 계층을 겨냥해 파리, 런던, 뒤셀도르프, 뉴욕 등에도 점포를 개점 확장했다.


    비즈니스 전략 2.

    끊임없는 기업 M&A를 통한 사업확장
    LVMH그룹은 합병을 통해 부동산, 생산, 광고, 영업 면에서 규모의 경제로 비용을 절감하고 사업다각화로 기존 브랜드의 성장률을 만회하고 위험을 분산하는 전략을 쓴다. 그러나 각각의 브랜드는 독립성이 보장된 경영방식을 채택한다. 멀티브랜드 전략이 유용한가에 대해서 예전엔 찬반양론이 팽팽했지만 최근에는 논란 자체가 없어졌다.

    LVMH가 매출 281억유로(약 41조원), 순익 34억유로(4조8000억원, 2012년)으로 자금규모가 커졌고 지난해 「불가리」를 50% 프리미엄을 얹은 가격인 5조8000억원에 인수(LVMH 주식과 맞교환)하면서 이런 자본의 게임에서 오히려 독립적인 브랜드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지미추」가 지난 5월 라벨럭스(Labelux)그룹에 8억달러(약 880억원)에 매각됐고 그 외 1조원 매출 내외의 탄탄한 기업 「버버리」 「티파니」도 지금 같은 시장상황 속에서는 멀티브랜드 그룹에 인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LVMH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적자 상태였던 DFS면세점(듀티프리쇼퍼스)과 세포라를 2002년까지 지켜내면서 결국 흑자전환을 이뤘다. 「도나카란」 「지방시」의 부진도 「루이뷔통」 「펜디」가 만회하는 전략을 활용했다. 또 「마크제이콥스」 등에 재정 지원도 아낌없이 한다.

    최근 「겐조」에도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기용하는 등 지원을 강화해 주목된다. 그러나 LVMH그룹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크리스티앙라크루아」는 80년대 말 런칭을 지원했던 브랜드였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2005년 사모펀드에 매각했고 그 후 2009년 결국 파산했다. LVMH그룹의 브랜드 인수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99년 「구치」의 34% 지분을 매입해 적대적 인수를 시도했던 ‘구치’ 전쟁이다. LVMH가 「구치」의 34%를 매입했을 당시 도메니코 데 솔레 CEO와 톰 포드 디자이너가 있던 「구치」는 LVMH의 인수를 반대했다.

    「구치」 측이 백기사를 요청했던 기업은 LVMH의 라이벌 PPR(피노 프랭탕 르두트)이었다. PPR은 「구치」의 40% 지분을 인수하면서 LVMH와 법정투쟁과 지분경쟁을 벌였고 LVMH가 지분을 넘기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내 LVMH의 「구치」 인수를 막았다. 그 이후에도 LVMH의 아르노 회장과 PPR의 앙리 피노 회장은 서로 언론에서 비난을 서슴지 않았고 법적인 소송을 거쳐야 했다. 그 후 또 하나의 굵직한 M&A는 「도나카란」의 인수였다.

    80년대 미국의 트로이카 브랜드(「폴로랄프로렌」 「캘빈클라인」 「도나카란」) 중 하나를 높은 프리미엄을 얹어 인수했으나 그 후 몇 년간 부진한 실적으로 매각설에 휩싸이곤 했다. 작년 LVMH는 이슈를 불러일으킨 뉴스 메이커였다. 「불가리」를 인수했고 「에르메스」 주식 20.2%를 인수해 M&A에 대한 야욕을 이어가고 있다. 아르노 회장은 평화로운 지분소유이며 「에르메스」를 적대적으로 인수할 계획은 전혀 없다고 언급했지만 과거에 LVMH 인수건이나 구치그룹 인수 시도 등을 감안할 때 전문가들은 「에르메스」를 결국에는 인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비즈니스 전략 3.

    신시장 수요에 발빠른 대응, 시계 주얼리로
    지난 2010년 기록적인 매출을 올린 시계 부문은 올해에도 중국 소비자들의 명품시계 붐에 힘입어 매출전망이 밝다고 스위스 바젤 시계박람회에 모인 업체들은 입을 모았다. 문제는 시계 장인의 부족에 따른 공급량 부족이라는 것이다. LVMH의 시계브랜드 「위블로」는 2010년 매출이 8000만달러(약 880억원)에서 올해는 1억900만달러(약 1200억원)로 35%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위블로」는 ‘억’소리 나는 10만달러(약 1억1000만원) 이상의 고가시계를 작년에 수백 개 판매했으며 그중 300만달러(약 33억원)짜리와 100만달러(약 11억원)짜리도 각각 1개와 2개가 있다고 언급했다. LVMH의 대표브랜드 「태그호이어」는 3000달러선의 시계에 주력해 몇 년간 두 자릿수 이상의 매출신장을 이뤘다. LVMH그룹의 시계 주얼리 부문은 작년 한 해 30% 매출 신장을 기록했다. 하이퍼 럭셔리 시계 수요가 증가하자 LVMH는 발빠르게 「불가리」를 37억유로(약 5조8000억원) 규모로 인수했다.

    50%의 프리미엄 가격을 얹어 불가리 패밀리가 가진 지분 50.4%를 LVMH 지분과 맞교환했고 나머지 지분은 같은 가격으로 매입했다. 2010년 당시 매출 10억7000만유로(1조7000억원) 규모의 「불가리」를 50% 이상의 프리미엄을 얹은 매우 비싼 가격으로 인수한 사실은 LVMH그룹이 시계 주얼리 부문의 성장잠재력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비싼 값을 지불하고도 향후 미래시장 성장을 예측하므로 괜찮은 딜이라는 것이다.

    LVMH그룹의 시계부문은 1999년에 신설됐다. 당시 「쇼메」 「제니스」 「태그호이어」를 인수했으며 2001년에는 「드비어스」 「프레드」와 조인트벤처를 설립했고 2002년에는 드디어 「루이뷔통」 자체 브랜드를 런칭했다. 마지막으로 2008년에는 고가 시계브랜드의 대명사인 「위블로」를 인수했다. LVMH그룹이 「불가리」를 인수함으로써 이제 시계 주얼리 부문의 구도는 「카르티에」 「피아제」의 리치먼드그룹과 「오메가」 「라도」의 스와치그룹, 「롤렉스」 간의 삼파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LVMH그룹은 시계부문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성공을 일궈냈다. 150년 전통의 「태그호이어」를 인수한 후 타이거 우즈, 스티브 매퀸, 브래드 핏, 우마 서먼 등을 기용해 광고캠페인, 3000달러선 다양한 상품개발, 여성시계 출시 등을 통해 기존의 올드한 이미지를 벗고 새롭고 트렌디한 히트브랜드로 만들어 냈다. 이제 이탈리아의 명품 「불가리」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업계의 시선이 모아진다.


    비즈니스 전략4.

    올드 브랜드에 영혼 넣는 창조적 디자이너 기용
    아르노 회장이 끊임없이 혁신적인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바탕에는 그가 디자이너의 창조성을 신뢰한다는 점이 깔려 있다. 알렉산더 매퀸, 존 갈리아노, 마크 제이콥스, 마이클 코어스 등을 과감히 기용해 올드한 이미지의 브랜드에 혁신을 더해 살려냈고 현재에도 끊임없는 새로움을 창조하며 럭셔리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루이뷔통」에는 마크 제이콥스, 「셀린」에는 피비 필로가 있으며 「지방시」에는 리카르도 티시, 「펜디」의 칼 라거펠트와 실비아 벤추리니 펜디가 그 주역들이다. 지난해 3월에는 패션계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LVMH의 자매사인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수석디자이너 존 갈리아노가 유대인 비하 발언으로 해고된 것이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존 갈리아노는 어시스턴트 디자이너의 자살, 스트레스 등이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져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존 갈리아노는 그 사건으로 자신의 브랜드 「존 갈리아노」에서도 해고됐다. 「크리스티앙디오르」의 후임 디자이너로 유력한 후보 중에는 영국 로열웨딩 드레스를 디자인한 「알렉산더 매퀸」의 사라 버튼,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 「랑방」의 알버 앨바즈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미니멀리즘의 대표주자 「질 샌더」의 라프 시몬즈가 전격 결정됨으로써 패션계 초미의 관심을 모았다.


    비즈니스 전략 5.

    패션 이어 문화 이끈다! 웹진 나우니스
    LVMH는 지난 2011년 2월 웹진 나우니스(newness.com)를 런칭했다. 매일 한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우니스는 문화전반과 LVMH 브랜드들, 그리고 경쟁 브랜드의 정보를 담고 있다. 잡지광고의 지면상 한계를 넘어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무제한의 웹 공간에서 풀어내겠다는 의도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맞게 나우니스는 웹상에서 소비자들에게 정보, 재미를 제공한다. 이는 소비자를 교육하고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소비를 하고 싶게끔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LVMH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만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 외 전반적인 문화현상, 예술, 음악, 영화도 있으며 경쟁사 「샤넬」 「에르메스」 「구치」 이야기도 소개한다. 소비자들도 일종의 광고이고 이런 형태의 홍보가 주관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보를 제공하는 나우니스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즐거운 경험이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웹진 나우니스의 강점이라면 소비자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잡지 광고에서 홍보물로 인식됐지만 웹에 올라오면 풍부한 양, 좋은 퀄리티, 그 외 다양한 엔터테이닝 요소로 인해 단순 홍보를 넘어 문화제공자가 된다.

    그렇다면 소셜 미디어가 매출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이기에 LVMH그룹이 웹진에 나서 문화를 이끌어가는 것일까? 미국의 정보사 포어시(Foresee)는 소셜 미디어의 정보가 소비로 연결되는 것은 5%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마케터들은 경제적 가치를 좀 더 크게 생각한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제공하면 이 정보가 입소문을 만들어내고 소비자들이 참여하게 되고 결국에는 매출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알면 선호도가 높아진다는 심리학의 ‘숙지의 원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LVMH의 웹진 나우니스는 기존의 웹페이지에 비해 소비자와 함께 정보를 소통한다는 점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소비는 이제 재미고 문화라고 인식된다. 소비자들은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이 알고 다양한 채널에서 소비하고 깐깐해졌다. 이들을 자신의 소비자로 만들기 위해서 브랜드들은 그들과 감정적으로 연결하고 라이프스타일에 의미를 주는 브랜드로 인정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다. LVMH는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새 정보와 스토리를 쓰고 있다.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는 철학을 담아 웹진 나우니스는 소비문화를 이끌고 있다.





    **패션비즈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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